법과 주먹(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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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의 서부영화를 보면 일단의 총잡이들이 보안관서를 습격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정당하게 법을 집행하려는 보안관에게 항거하기 위해 습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안관을 악인으로 설정해 정의의 총잡이들로 하여금 악을 응징하는 의미로 보안관서를 습격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서부영화들이 대개 권선징악으로 결말나는 만큼 보안관이 악인인 경우에는 총잡이들이 법을 상징하는 보안관서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관객들은 갈채를 보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안관이 아무리 악인이고 총잡이들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개인이 법을 집행하는 기관에 침입,악을 응징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것을 응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나 사람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주어진 「힘」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법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된다. 당연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법이 지배되고 법보다 더욱 강력한 「힘」 앞에서 법은 무력하게 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우리네 속담은 그런 경우에서 유래됐을 것이다.
국민의 안녕과 공공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경찰에는 여러가지 수단과 권한이 부여돼 있다. 불심검문,위험발생 방지조치,범죄의 예방과 제지조치,가택출입,무기사용 따위가 그것이다. 그같은 경찰권은 바로 국민에게 명령 또는 강제할 수 있는 국가권력과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찰이 주어진 수단과 권한을 포기하는 것은 곧 국가권력을 방기하는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20여명의 폭력배들이 전과 4범의 피의자를 구해내기 위해 파출소를 습격한 사건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몇명의 파출소 순경들이 출입문을 잠그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변명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한 경찰서의 추석 「떡값」 수뢰사건에 뒤이어 터진 이번 사건은 이 시대의 경찰의 위상을 한마디로 대변한다. 특히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강조한 것이 「국가기강확립」이었다는 점에서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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