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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산다>9.정년후 무주계곡 정착 前육군장교 이상대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또랑또랑 흐르는 얼음 물소리가 머리를 명징하게 하는 전북무주군의 한 계곡(적상면방이리 산197).
잔설이 깔린 냇가의 징검다리를 건너 인적이 없는 골짜기를 찾아나섰을 때「매헤헤」염소들의 합창이 멀리 겨울하늘가로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표적삼아 밤송이와 낙엽이 수북이 깔린 산과 산사이의 계곡을 걸어올랐을 때 구레나룻이 도사같은 李相大씨(51)가 1백여마리의 염소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시간의 흐름이 오래전에 정지해버린 듯한 「원시적인」그의 삶터와 모습은 생활에 찌든 도시인에게 잠시 현기증으로 다가왔다.
낯선 이방인을 보자 투실하고 건강한 누렁이들이 짖어대기 시작했고 이소리에 놀란 토종닭과 염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육군대학과 방송통신대를 졸업,군인들에게 참모학을 가르쳤던 교관출신 李씨가 느닷없이 「염소치기」로 변신한 것은 5년전인 지난 89년 여름.
43세인 86년 연령정년이 돼서 「밀려났다」는 그는 서울에서중소기업 직원.구멍가게등을 2년여 전전하다 무주의 한 계곡으로아예 이주해버린 것.
원주에서 군복무를 했던 한때 텃밭농사에 재미를 붙였던 그는 자연에의 삶을 목말라했고 88년 누이와 함께 좋은 장소를 물색하던중 평화롭고 산세가 완만한 이 산에 반하게 됐다.그와 누이는 평당 3백원꼴이 못되는 2천9백여만원을 주고 11만평의 산을 아예 사버렸다.
이 산을 이용,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궁리한 끝에 산의 품이 넉넉한데다 인적이 드물고 염소들의 좋은 먹이인 칡이 많은 이곳에서 염소를 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염소라고는 생전 먼 발치에서 보기만 했던 그는 이 동네에서 염소를 치는 사람에게 사정해 37만원에 염소 세마리를 사들여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새끼염소는 6개월~1년정도 키우면 다자라 보통 한해에 두번 네마리정도의 새끼를 번식시킬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신출내기 염소치기인 그는 계속 염소를 사다 넣었지만 병들어 죽고 잃어버려 5년여가 흐른 지금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라고 전했다.
그사이 많은 염소를 잃고 독학으로 깨우친 것도 많아 이제는 무언가 알 ■같다고 했 다.지난해엔 수놈 30마리를 보신용으로3백여만원에 팔아넘겼다.
보신용인만큼 경기가 안좋은 요즘은 염소값이 헐값이 돼버렸다고그는 안타까워 했다.
고등학생.대학생인 2남1녀와 아내(45)는 서울암사동에 따로살고있는데 이들의 생계비는 23년간 군인으로 몸담아 생긴 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모든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그는 염소떼를 몰아 먹이를 찾아주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겨울철이라 먹이가 부족,하루에 한두번 사료를 곁들여 줘야하고새끼도 받아내야 하므로 이 골짜기를 하루도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두평남짓한 오두막에 살고 있다.촛불을 켜고 겨울인 요즘땔감을 주워와 군불로 방안을 데우는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원시적이었다.
부탄가스버너에 밥을 해먹고 손쉬운 돼지고기 김치찌개.참치통조림등을 신물이 나도록 먹어왔다.개들에 시달려 아예 나무위에서 살고 있는 토종닭 몇마리가 매일 낳는 메추리알만한 달걀들이 그의 영양보급원이다.
그의 아내는 1주일여에 한번 들러 그에게 마른 반찬.김치등을가져다주는데 눈도 만만치 않게 오는 이 골짜기에서 어떤때는 며칠씩 눈속에 갇히기도 한다.여름에는 산앞의 개울물이 불어 역시그의 발길을 산속에 묶어두기 예사.
그는 삶의 덧없음을 가르치는 이 겨울과 함께 이곳의 여름을 사랑한다고 했다.머루.다래.산딸기가 그의 목을 축여주고 지난해엔 손가락 굵기만한 산삼 세뿌리도 캐내 몇십만원에 팔아 그의 생활에 보태썼다.
이곳을 넘어 30분 떨어진 민가로 가는 사람들이 가끔 위로차들르지만 그는 너무 바빠 외로울 틈이 없다고 했다.
약아빠진 일부 염소들은 축사에서 먹이가 많은 산등성이까지 오가기 귀찮아서인지 그가 호루라기로 불러도 「매헤헤」대답도 않은채 며칠씩 돌아오지 않아 그를 골탕먹이기 일쑤기 때문.
그와 몇년째 정을 나누고 있는 뿔이 멋진 47번 숫염소는 그가 부르자 강아지처럼 다가와 그의 품에 안겼고 손님을 배웅하는그의 뒤를 염소들이 졸졸 따라나섰다.
표정이 나날이 맑아지는 남편의 산생활에 매료된 그의 아내도 막내가 대학 에 들어가는 2년후께 이곳에 합류할 계획이다.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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