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 활용 못하는 전 대통령들/오병상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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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국민들은 퇴임한 대통령의 얼굴을 볼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해왔다. 대개 권좌를 물러나는 일부터 비극적이었기에 전임대통령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승만대통령의 경우는 미국으로 망명했기에,박정희대통령은 죽음으로 물러났기에 더이상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전두환대통령 역시 백담사에 은둔했으며,노태우대통령도 재임중 사건들에 대한 의혹과 수사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대개 국민들은 전임대통령에 대해 어두운 인상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김영삼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뤄진 청와대 회동에 나타난 전임 대통령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전·노 전 대통령은 『유익한 모임이었다』고 흐뭇해 했으며,최규하 전 대통령도 『화기애애했다』고 밝혔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은 『김 대통령이 「대통령문화」를 만들고 있다』며 「대통령문화」를 『나라에 문제가 있으며 전임대통령이 현임 대통령에게 자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전임 대통령의 경륜으로 국정운영의 자문에 응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아쉬움의 표현이다.
대통령이라는 소중하고 희귀한 경륜이 재활용되지 못한다는데 대한 아쉬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전임대통령의 행보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힘들다.
현직 대통령 시절 가장 인기가 없었으면서도 퇴임후 가장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그는 알다시피 이란 인질구출사건의 참담한 실패 등 나약한 대통령이미지로 재선에 참패했다. 그러나 그는 퇴임후 가난한 사람 집지어주기운동과 세계적 분쟁 중재활동·인권보호운동 등 각종 봉사활동을 묵묵히 벌여왔다. 현직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 수시로 전화해 조언하거나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세계 각국 인권피해자들을 위해 해당국가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선처를 호소하기도 하며,「전임 미국대통령」이라는 그의 명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지거나 석방될 수 있었다.
우리의 전임대통령들도 카터 정도는 안되더라도 여러 순수한 봉사활동을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에 모범을 보여주길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전임대통령들이 패거리를 지어 산이나 온천,유명식당 등으로 쏘다닐 것이 아니라 뭔가 생산적인 봉사활동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만 「대통령문화」가 이 땅에 정착될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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