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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제1부 불타는 바다 탈출(17) 더듬듯 숙소 나무벽을 끼고 돌아 명국은 변소를 나왔다.바람에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두 팔로 가슴을 껴안으며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나서던 명국은 고개를 들어 일본인들의 숙소를 올려다보았다.태복이 늘 하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
『높기는 높다.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야 우리가 여기서 고생하는 게 보이지가 않을 거다.안 그렇냐?』 『지 고생지가 하기지,보이고 안 보이고가 무슨 상관이여.』 『사람 팔자,차암 얼룩덜룩 하다 그 말이지.』 『그걸 이제 알어?』 『아옛날에는 짐작으로나 알았지.그리구 말이지,세월 지나면 무슨 끝이 있어도 있겠지 했던 거 아니냐구.헌데,그게 아니여.거렁뱅이피했나 싶으면 문둥이 오고,문둥이 피했다 싶으면 아이구 범 나오는 게 내 팔자인가 봐.』 『별놈의 소리.저 높은 데 있는 것들이랑 이 밑에서 쭈그러져 있는 우리 팔자랑 뭐가 다르다는 거여? 바다 밑구녕 파고 들어가서 탄 캐내기는 마찬가진데.』 하루 지나고 나면 모처럼 낮에 일이 없는 날이었다.햇빛 좋으면숙소 사이를 걸어서 신사 있는데나 올라갔다 올까.태복이 놈,거기 가는 건 드럽게 싫어 하더니.저어기나 가지 않을래? 하면 왕소금 뿌려놓은 미꾸라지 마냥 강중강중 뛰며 난리더니.아,조선놈이 왜 왜놈 귀신 모시는 델 가서 꾸벅꾸벅 절을 하자는 거냐? 귀신도 조선귀신이 있고 왜놈 귀신이 있는 거여.
입술을 비틀어 쓰디쓰게 웃으면서 명국은 돌아섰다.파도소리가 바람에 실리며 어둠 속을 휘젓듯이 쓸려왔다.
그래,언제까지 기다리겠냐.뭐가 보인다고 기다리겠냐.명국이 가래를 돋워 길게 뱉어냈다.
『아이구,놀래라.』 불쑥 어둠 속에서 조선말이 들려왔다.놀라기는 명국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시오?』 『누구는,소피 보러 가는데도 본관찾고 통성명하자는 거요.무슨 사람이 인기척이라도 하며다니든가.뭔 도적질을 하는 것도 아니겠는데,사람이소리도 없이 다니고 그려.』 말도 많다 싶어서,명국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자다가 뭐 오줌까지 누고 사슈.그냥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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