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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화제>이동휘선생 항변서 7편 발견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이번에 새로 발견된 李東輝의 글 7편은 한말 무관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및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격인 그의 초기 사상적 편린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주한 일본공사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주한일본군사령관에게 을사늑약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보낸글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인 『遺疏』에서 李東輝는 『陛下께서 外寇들에 견제되어 그들(오적)에게 형벌을 가하지 못하고 계시므로 국가의 수치가 날로 심하다』며 『감히 隻手로 그들을 죽여 장차의 더 큰 화를 예방하려 한다』고 비장한 심정을 담고있다.
乙巳五賊의 죄를 성토한 『賣國公賊聲罪文』에서는 『(일본의)마음과 입을 빌려 함부로 위약을 체결해 우리 대권을 割讓하고 聖上에 협박을 가했으며 또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諫爭의 길을 막고 충성스런 신하들을 謀害했다』고 이들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한뒤 『죄가 크고 깊어 천지 사이에 용납될수 없으므로 너희들의 머리를 베어 위로는 성상의 근심을 덜고 아래로는 公憤을 해소하려 하니 너희 賣國公賊들은 나의 칼을 받아라』고 무관다운 직설적 표현으로 처단계획을 밝히고 있다.
조약을 강제로 체결케한 장본인 하야시공사에게 보내는 글에서 李東輝는 『신조약체결이 일본의 자위상 부득이했다는 대목은 우리나라로 보면 국권을 해치고 있으며 또 조선이 신뢰를 잃었다는 부분도 국권을 잃은 처지에 어찌 신뢰를 강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조목조목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李東輝의 글들은 자필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尹炳奭교수(仁荷大)는 을사늑약 체결후 이듬해 2월 설치된 통감부에서 자료를 수집해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大韓帝國 陸軍參領 李東暉」라고 서명 한 부분에 대해서도 尹교수는『李東輝선생이 북간도로 망명하기 이전에 李東暉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기록이 여럿 보인다』고 말했다.
1918년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우리나라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을 창설했던 李東輝는 임정의 초대국무총리를 지냈음에도사회주의활동 경력 때문에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그 이름이 잊혀져왔었다. 최근 들어 국내 학계에서 항일독립운동시절의 사회주의운동이 재평가되면서 李東輝에 대해서도「민족주의성향의 사회주의운동가」라는 새로운 자리매김이 시도되고 있다.
1872년 함경도 단천출신의 李東輝는 18세때 한성무관학교에들어가 졸업후에는 대한제국 육군참령으로 강화도진위대 대장등을 역임했다.군대해산이후는 강화도에서 한때 의병활동을 계획하다 투옥되기도 했다.그후 李東輝는 미국인선교사의 도움 으로 석방돼 안창호.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1911년 만주 명동촌으로 망명한 李東輝는 무장항일운동을 주창하며 만주에 흩어진 독립운동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보였는데 연해주로 이주해서는 한인사회당을 창당,사회주의운동을 펼쳤다.
또 임정내의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해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으나 코민테른에서 보낸 자금의 유용문제에 휘말려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 노령내의 한인규합에 힘을 쏟았다.
1920년대 중반 국내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막후에서 활동했던 그는 1930년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도서관장을 지내며 국제혁명운동자후원회에서 활동했다.조직활동중 일경에 쫓겨 노숙한게 병이 돼 1935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 촌에서 병사했다. 〈尹哲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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