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바나나(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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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조선왕조실록 숙종조편을 보면 외국쌀 도입얘기가 나온다. 숙종 23년(1697년)에 곡창인 호남·영남·관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대흉이 들어 당장의 식량은 물론 다음해의 종곡조차 준비할 수 없는 처지였다. 조정은 이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웃 청나라와 쌀도입 교섭에 나선다. 그 결과 이듬해 청나라는 교역미 2만섬과 구휼미 1만섬을 의주로 보낸다. 구휼미란 조선국민의 기근을 구하기 위해 청황제가 무상으로 보낸 쌀을 말한다. 이때 청나라 관리들은 조선 국왕이 의주까지 나와 청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할 것을 요구한다. 또 구휼미도 교역미와 같은 값으로 쳐서 돈을 받아내 사사롭게 착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가 쌀의 자급을 1백% 달성한 것은 불과 10년전의 일이다. 그 이전만해도 절대량이 부족해 보리·옥수수·감자·고구마같은 것으로 연명하며 힘겨운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것이다.
일제식민통치기간엔 그나마도 질좋은 우리 쌀은 일본이 공출제에 의해 수탈해가고 모자라는 식량은 질나쁜 대만산과 미국산을 수입해 메우고 만주지방의 조·수수 등 잡곡을 반입해 충당했다. 우리나라를 자기네들의 양곡수급 안정을 위한 조절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광복직후 혼란기엔 유엔한국재건단(UNKRA) 등 국제구호기관에서 수입해 행정기관이 배급하는 양곡을 먹고 살았다. 한국동란중과 직후에는 정부와 민간에서 도입한 양곡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50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미공법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은 국내 생산량의 15%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었다. 이 때문에 식량의 만성적 부족상태를 완화할 수 있었고,63년의 식량파동을 극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국 잉여양곡의 안이한 도입은 식량자급화를 위한 생산전략을 지연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서부터 실시된 식량증산정책과 양곡소비구조의 변화로 쌀이 남아도는데도 전체 양곡의 자급률은 급격한 감소추세다.
이 시점에서 쌀시장 개방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2년전 농산물시장 개방확대 때문에 제주도의 바나나 재배농가가 모두 폐농했다. 우리 국민의 한이 맺힌 쌀이 바나나 신세가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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