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유전쟁] 36. 위기의 첫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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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민족사관고도 대학 입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다만 '대입 학원' 기능은 최소화하고 창조적인 영재교육기관 역할을 최대화 하는 게 민족사관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이었다. 그 길에는 곳곳에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교한 해인 1996년 6월 학부모회가 출범했다. 이에 앞서 일부 학부모는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각각 모임을 만들어 학교 일과 아이들 문제를 의논해 왔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육에 대한 민족사관고 학부모들의 의구심과 불안감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교육부의 종합생활기록부(종생부) 제도 개선 지침이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96년 8월 강원도교육청에서 종생부 개선 지침이 내려왔다. 종생부는 내신 성적을 산정하는 주요 자료다.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서울대가 학년별 성적에 대한 내신 반영 비율을 1학년 20%, 2학년 30%, 3학년 50%로 한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르면 민족사관고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민족사관고에서 최하위 내신 점수를 받는 학생도 일반 고교에 가면 최상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학교 다니다가는 서울대 못 간다"는 말이 지독한 전염병이 퍼지듯 나돌았다. 서울대 법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학생 17명의 부모가 앞장섰다. 그들은 내게 교육 방법을 바꾸고 인문계 교사진 강화와 수업 시간표 조정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들은 서울시교육청.강원도교육청과 청와대에도 민원을 했다. 그래도 학교 측이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언론을 움직였다. S방송.Y통신 등이 민족사관고가 곧 문닫을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수업 시간표를 일부 조정하면서 학부모들을 설득했으나 근본적인 교육 목표와 방침은 고수했다. 그러자 2학기 초인 8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10여일 만에 다섯명의 학생이 학교를 떠났다. 교실이, 학교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0월 들어 네명이, 11월에 두명이 전학했다. 첫 입학생 30명 중 11명만이 2학년으로 올라갔다.

민족사관고 1기생의 부모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영재교육 방법을 믿고 자랑스러운 아이들을 강원도 산골짜기로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한 학부모의 솔직한 심정을 들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밤 늦게까지 개인지도를 해준다고 하니 과외공부시키는 셈치고 넣었다가 3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하면 내신 성적도 잘 받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계산을 했다"고 말했다. 학교의 꿈과 학생.학부모의 꿈이 이렇게도 엇박자였던가.

교사들도 떠났다. 개교준비위원 여덟명 중 여섯명이 그만뒀다. 영어.체육교사만 남았다. '최명재의 독선 때문에 올바른 교육을 하기 어렵다'는 게 떠난 교사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97년 신학기가 되자 28명의 교사 중 20명이 새 얼굴이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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