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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쓴 편지] 조씨 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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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소인 유참판 댁 안사람 조씨라 하오. 조선 땅의 실로 많은 백성들이 우리의 활동사진을 보았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고자 예 나왔소.

사실 남녀상열지사야 시대를 가로지르는 인간사의 최중대사가 아닌가 생각되오만, 우리에게 유독 지대한 관심이 쏠렸던 연유는 그동안 활동사진 속에서 백성들이 보아온 상열지사라고 해야 아랫도리가 유달리 큰 상것들이 산골 무지렁이 아낙들과 물레방앗간이나 뽕나무 숲에서 벌여온 짓거리들이 대부분이었을진대, 우리 같은 기품 있는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들이 안방에서 모두가 정인 하나씩을 두고 정을 통한 이야기가 참으로 참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 믿소이다.

모두들 하고 있고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대부 남녀의 '통(通)'하는 이야기가, 서리서리 몸을 감싸고 있던 도포자락과 치맛자락을 한꺼풀씩 걷어내면서 눈앞으로 펼쳐지니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 한들 어찌 그 백성들과도 '통'하지 않을 수 있겠소. 호호호.

한데 듣자하니 일부 백성들은 내가 마음속에 품었던 유일한 정인이었던 사촌 조원을 그처럼 허망하게 떠나 보낸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다고요. 저 또한 그토록 상열지사에 현명한 줄로만 알았던 조원이 그토록 미욱한 모습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더이다. 우리 비록 근친인 관계로 몸은 가까이 하지 못했으나 서로 마음속의 방에 들어갈 이는 둘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리하여 몸은 다른 곳에서 노닐어도 마음은 한 가지로 통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던 조원이 옷도 곱게 입을 줄 모르고 남정네의 몸이라고는 맛도 보지 못한 정절녀 숙부인에게 내기걸 듯 다가섰다가 진심을 내보이고마는 어리석음이라니!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그토록 위험한 내기에 몸 던지게 하는 나의 사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의 솔직한 심정이 무엇이오. 둘만의 사랑을 가지고 확신하지 못해서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우회적으로 확인하려 들지 않소이까.

심지어 상대가 그런 관계를 통해 시기심을 느끼면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고 생각하기조차 하지 않더이까. 더구나 각자가 마음 통할 사람따로 정 통할 사람 따로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자처하는 우리였으니 사랑 놀음에 내기 좀 걸었기로서니 큰 탈이야 없을 줄 알았지요. 그러나 이제 조원과 숙부인 모두 이승을 등진 이제야 나의 자만과 희롱이 진짜 사랑을 놓쳐버리는 우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소.

내 일찍이 갖고자 하는 마음과 가질 수 없으면 부수어 버리고 싶은 마음만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을 가당치 않은 소리로만 여겼소만, 내 겪은 바로는 마음 한 가지조차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가 우리 인간이더이다.

내 듣기로는 요사이 장안 젊은 남녀들은 우리 사대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랑놀음을 하는 일들이 많다고요. 충언하자면 사랑에 결코 자만하거나 그것으로 희롱하지 마시오. 그 사랑이라는 것이 참으로 조화스러운 것이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당혹감에 떨게 될 테니 말이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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