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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압구정동블루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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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을 뜨는 아침,소설가 두보(杜甫)씨는 극심한 두통을 느낀다.
두통뿐 아니라 지난 밤 술자리에서 오갔던 무수한 말의 파편들이온몸 구석구석에서 살아올라 동통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뭔가,자신이 유지해 오던 모든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초 토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견디기 어려워 그는 다시 눈을 감는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네 명의 소설가와 두 명의 시인,그리고 한 명의 평론가가 어울리던 지난밤의 술자리가 되살아난다.대한민국 문학의 흐름이 어쩌고,신세대 문학이 어쩌고,누구의 어떤 작품이 어쩌고,누구의 소설 판매 부수가 어쩌고…,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인가 좌중의얘기가 이상한 식으로 격해지기 시작한다.평론가가 신세대 작가들의 문체가 어쩌고 하다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하고,그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얘기가 오가고,그러면서 좌중의 분위기가 빠르게 가열되기 시작한다.모 두가 취해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취했다는 걸 시인하지 않으려는 것처럼,그렇게 얘기가 격해져가기 시작한다.한 치의 양보도 없이,결국은 제자리를맴돌면서,무슨 얘기를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일까.
소설가 두보씨가 등장한다.자신도 모르게 격해진 감정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에 대해 침을 튀기기 시작한다.국적이 일본이지 정신적으로는 철저하게 미국화되어 있는 작가라는 얘기를 하고,서양적인 것에 대한 무반성적인 동경심을 얘기 하고,그러다가 느닷없이 그의 소설에 무절제하게 사용되는 차용어가 역겹다는얘기를 한다.그러고 나서,말하자면 이런 것이라고 예문을 든다.
『그녀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하고 있다.요트파커와 블루진즈,빨간 아디다스 슈즈,손에다 케이크인지 쿠키인지 그런 것을 들고 있다….』 두보씨의 얘기가 좌중에 파문을 몰고온다.세상이 국제화되어가고 세계적인 상표가 범람하는 세상인데 그런 걸 굳이 문제시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시인의 반발,그것이 일리가 있다는다른 소설가의 동조,하지만 무절제한 것은 곤란하다는 평론 가의신중론,그러고 나서 두보씨는 격해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상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침식당하는무비판적인 정신,그리고 그것이 잉태하는 무절제한 욕망과 자기과시욕,그런 것들이 형성하는 또 다른 계급의 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러고 나서 그는 아침에 자신이 신문에서 읽은 칼럼의 특정 부분을 다시 인용한다.텔리비전에 나와 어이없을 정도로 영어를 남발하는 패션 디자이너와 미용사의 말. 『컬러 자체가 모노톤을 벗어나고,액세서리도 크리스틀로 코디네이트해서,패던트로 포인트를 주고,테일러 재킷을 칼러만 떼어새로운 디자인을 연출하고,하이틴이라면 슬림한 스타일은 스커트를롱하고 캐주얼하게 입어….』 『브러시로 웨이브를 살려 스프레이를 뿌리고,입술 펜슬로 라인을 치고,컬의 형태를 고정시키면 트리트먼트 효과가 있고,강한 머리는 풀어서 볼륨을 주어야 하며,이 손님은 드라이만 좀 하고 세트를 말아 클래식한 분위기를 만들고….』 설가 두보씨는 다시 눈을 뜬다.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신이 초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술자리가 그런 식으로 거칠어지다 어떻게 파장을 맞이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결국은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쓸데없이 술주정을 한 격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세상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바로그걸 소설로 쓰면 될것 아냐! 누군가 두보씨에게 그렇게 고함치던 생각이 문득 되살아난다.누구였을까….그걸 생각하다가 전혀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아차하며 그는 문득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벽시계를 본다.작사가가 된 대학후배 두팔(杜八)씨와의 약속이 그제서야 떠오른 것이다.하느님 맙소사! 오후 한시,압구정동 전철역 부근에 있는「러브터치」라는 카페로 와요.이번에 내가 작사한게『압구정동 블루스』인데,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요.왕창 뜰것 같은 예감이 든다구요.그러니까 형이 그 가사를 마지막으로 한번만 봐줘요.혹시 결정적 인 실수같은 거나 하지 않게 딱 한번만 검토해달라구요.노래만 뜨면 내가 퍼지게 한턱 쓸게요.알았죠? 압구정동 전철역 지하도에서 빠져나와 두보씨는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하지만「러브터치」라는 카페가 오렌지족을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러브 터치…,사랑의 주물럭 ? 그는고개를 갸웃거리며 붉은 카핏으로 덧씌워진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간다.
카페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사방을 두리번거려보지만 작사가 두팔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내가 삼십분이나 늦었는데,이 자식은 뭐야.그러니까 나보다 더 늦는다는 건가? 괘씸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구석진 곳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손님이별로 없지만,그래도 한복판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는게 왠지 모르게 거북살스럽게 느껴진 때문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두보씨는 담배를 피워문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실내를 둘러본다.아무리 둘러보아도 삼십대 중반의 두보씨같은 사람이 들락거릴 만한 장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욕망의 해방구」라는 곳에서 어째서 정서적인 긴장감을 느끼게되는 걸까.그는 나타나지 않는 두팔씨를 욕하며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본다.
두 시가 가까워질때까지 두팔씨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나타나면 한 대 쥐어박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때 두보씨 앞자리에 젊은여자 애들 둘이 들어와 앉는다.얼핏 보기에 열아홉이나갓 스물,그쯤 되었을 것 같다.나이에 걸맞게 그 둘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한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두보씨는 벌레씹은 사람처럼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벌레 씹은 표정에서점차로 화장실엘 못가 폭발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의 표정으로 변해간다.
『얘,너 헤어스타일 좀 델리케이트하게 바꿀 수 없니? 바꾸면너도 꽤 로맨틱하게 보일 텐데,왜 맨날 스트레이트 퍼머만 하니?』 『아니,너에게 그렇게 깊은 뜻이?…쳇,웃기구 있네 기집애.넌 옷이나 좀 드레시하게 입고 다녀라.옷도 많은 기집애가 왜맨날 펑크 팬츠만 입고 다니냐?』 『물론 옷이야 널널하지.하지만 난 캐주얼이 좋아.드레시한 건 도통 체질에 안 맞는다구.』『글쎄,시키는대로 해봐.그럼 톰 크루즈처럼 샤프한 남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너나 가져라.난 그런 코드는 싫어.그런 기종은 호환이 안된다구.난 오히려 걔 와이프인 니콜 키드맨이 좋더라.』 『어유,너 레즈비언 기질이 있구나.이쪽 저쪽으로 호환이 되는 기종이지,그치?』 『아유,징그러워.어쩜 네 다이얼로그는 맨날 그렇게 포르노틱하니?』 ***두 보씨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화장실엘 못가 폭발 일보 직전에 처해 있는 사람의 표정 그대로다.이 망할 놈의 새끼,나타나기만 해 봐라.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고 나서 그는 또다시 두팔씨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예배당 종 치듯이 ,아니 마른 북어 두들기듯이…,그래 그렇게 박살을 내야지.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의 귓전으로는 여전히 국적 불명의「다이얼로그」가 밀려든다.그 옛날의 뙈놈들처럼,더 먼 옛날의 쪽바리떼처럼.
『너 나한테 새로 생긴 터프가이 있는거 모르지?』 『어머,누군데?』 『며칠 전 소개팅에서 만났는데,괴장히 볼륨 있고 다이내믹해.』 『춤을 잘 추는구나!』 『기집애,히어링 하나는 끝내주는구나.하지만 춤만 잘 추는게 아니고 오도시도 끝내줘.어제 그 오빠랑 스시 먹으러 로바다야키에 갔었는데,거기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정말 캡이야,캡!』 『기집애,완조니 뿅 갔구나,뿅갔어.』 『부럽지?』 『아니,그 정도는 나한테도 널널해.귀찮을정도야.』 두보씨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몸을 뒤튼다.눈살을 한껏 찌푸리고 인상을 쓰는 게 설사병 환자의 표정 그대로다.이 빌어먹을 놈,망할 놈,나쁜 자식….이마에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찍어내며 그는 마지막이다 싶은 심정으로 다시 한번 손목시 계를본다.자리를 지킨지 어느덧 한 시간.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고싶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어떤 식으로도 선뜻 결정을 내릴수 없다.그 순간에도 그의 귓전으로는 여전히 국적불명의「다이얼로그」가밀려든다.급하면 옷에다 싸는 건가? 아니 ,자신의 몸을 스스로화장실로 만들수야 없는 것 아닌가.떡칠 놈,나타나기만 나타나봐라,압구정동 블루스가 아니라 북어포 블루스를 쓰게 해 주고 말거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문득 이상한 고함이 그의 머리 속에서 폭죽처럼 터져오른다.
세상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바로 그걸 소설로 쓰면 될 것 아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그리고앞자리의 여자애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이봐,이것 보라구!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말이라고 배워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거야! 아가씨들 국적이잘못된 건가,아니면 내 국적이 잘못된 건가? 도대체 여기가 어느 나라야!』 두보씨의 느닷없는 고함에 그녀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하지만 두보씨가 무엇을 문제시하는 지를 이내 알아차린 듯 그녀들은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하지만그 두 명중 하나가 자리를 빠져나가며 두보씨 쪽으로 고개를 홱돌리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으이그,웬 노땅,재수 캡!』 ***그 때 허겁지겁 작사가 두팔씨가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여자아이들은 밖으로 나가고,아이고 형! 정말 미안해요,『압구정동 블루스』때문에 작사가 협회에들렀다가 이렇게 늦었어요,정말 미안해요,어쩌고 하면서 두팔씨가두보씨 맞은편에 자리를 잡 고 앉는다.다른 아무런 얘기도 없이두보씨는 전혀 엉뚱한 질문을 그에게 건넨다.
『야,웬 노땅 재수 캡이란 게 무슨 뜻이야,빨리 말해.』 『웬 노땅 재수 캡? 웬 늙은이 때문에 재수에 왕창 옴 붙었다,그런 뜻 아뇨?』 두보씨는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낀다.하지만 분노와 비애의 감정이 서로 뒤섞여 도무지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른채 그는 한동안 눈만 껌벅거린다.파리를 잡아먹어서가 아니라,그것을 놓쳐버려 눈을 껌벅거리는 두꺼비처럼.
『블루스로군.정말 서글픈 블루스야….』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그는 담배를 피워문다.그리고는 정말 재수에 옴 붙은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국적 불명의 젊의 것들 때문에 재수에 왕창 옴 붙은 날.
빌어먹을,웬 소땅 재수 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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