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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유동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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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액체(liquid)의 특성은 물이나 기름처럼 일정한 형태를 갖지 않고 용기의 모양에 따라 자유롭게 형태가 변하는 것이다. 액체처럼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주변 여건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성질이 유동성(liquidity)이다. 어떤 사태가 유동적이라고 하면 주변 상황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처럼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돈의 흐름이다. 돈은 손쉽게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자산이다. 돈만 있으면 물건을 살 수도 있고, 부동산을 사둘 수도 있으며, 채권이나 주식에 투자할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 유동성은 어떤 자산이 얼마나 쉽게 다른 자산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척도다. 현금은 유동성이 가장 높고, 부동산이나 미술품처럼 처분하기 어려운 자산의 유동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경제 전체로 볼 때 유동성이 높다고 하면 화폐를 포함해 쉽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자산이 많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유동성은 시중에 풀린 돈의 양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이른바 광의의 유동성(L)은 시중에 유통되는 현금통화와 금융기관의 현금성 자산에 정부 및 기업이 발행한 채권까지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통화지표다. 한마디로 유동성이 커졌다는 것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다는 뜻이고, 유동성을 흡수한다는 것은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인다는 뜻이다.

요즘 국내외적으로 유동성이 도마에 올랐다. 국내에선 너무나 늘어난 유동성을 흡수한다며 한은이 콜금리를 올렸다. 반면에 국제 금융시장에선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로 촉발된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들이 자금을 무제한 공급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과 그에 따른 신용경색이 실은 2003년 이후 세계적으로 진행된 과잉 유동성의 결과라는 점이다. 유동성을 지나치게 늘린 나머지 부실 위험이 큰 부동산 대출에까지 돈이 몰렸다가 대출을 못 갚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금리가 뛰고, 대출 원리금 갚기는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다. 돈이 많이 풀린 결과 시중에 돈줄이 마르게 된 것이다. 중앙은행들은 과잉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동성을 더 늘릴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지난주 유동성 흡수에 나선 한국은행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유동성이 말 그대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를 부리는 형국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