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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북한>35.측근세력 군 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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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金正日이 金日成에게서 모든 직위를 넘겨받기전에 軍최고사령관과국방위원장자리부터 먼저 차지한 것은 권력이나 체제유지면에서 그만큼 軍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金正日 측근세력은 어느 부문보다 軍계통에 강력히 포진하고 있다.그러나 軍은 타부문 측근들에 비해 공개적인 활동이 뜸한 편이어서 내막이 가려져 있는 형편이다.
軍측근으로는 항일빨찌산세대와 군사테크너크랫이 양날개를 이룬다.노장 빨찌산세대 군지도자들중 金正日의 최측근으로는 인민군「차수」인 白鶴林.李乙雪.朱道日 세사람이 단연 선두다.
北韓은 군장령(장성)위에 대원수.원수.차수라는 군사칭호를 두고 있으며「대원수」는 국가주석 金日成,「원수」는 국방위원장.최고사령관 金正日과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인민무력부장 吳振宇다.「차수」는 8명으로 白.李.朱 3인외에도 군총참 모장 崔光,김일성군사종합대학장 崔仁德,당중앙군사위원 李斗益,인민무력부 부부장 金奉律.金光鎭등이 포함돼 있다.
白.李.朱 3인은 권력의 최고봉인 당정치국원은 아니지만「정치국원급 대우」를 받는 특이한 존재다.이들은 당 군사지도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군서열상 金日成.金正日.吳振宇.崔光 다음으로 랭크돼 있다.
이들중 白鶴林은 정부의 사회안전부장을 겸한「치안총수」이며 李乙雪.朱道日은 국가 군사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 위원을 겸해 직책상으로도 막강하다는 것을 바로 알수 있다.특히 朱는 평양방어사령관도 맡아「수도권방위」의 중책도 수행한다.
게다가 이들의 경우 직책에 비해 영향력이 더 크다는게 前북한고위관리의 설명이다.즉 이들은 빨찌산시절부터 金日成을「곁에서 모셔온」데다가 金正日의 후견인 노릇을 해왔기에 金日成.金正日에게 속마음을 터놓고 마음껏 얘기할수 있는 인물이 라는 얘기다.
이들은 1930년대 중반 金日成 빨찌산부대에 들어가 호위병.
전령병으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다.白鶴林은 함북 풍산에서 태어나 어릴때 부모를 따라 간도로 이주해 그곳에서 민족주의자들이운영하던 사립학교에 다니다 빨찌산부대에 들어갔다 .함북 무산출신인 李乙雪은 간도 화룡에 이주해 살다가 무장투쟁에 참가했으며朱道日은 간도 왕청태생으로 15세때부터 金日成을 따라다녔다.
또 이들은 1940년대 초 金日成과 함께 소련으로 가 蘇극동군 특수정찰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동태파악차 청진.함흥등 국내를 드나들었고 해방때 金日成을 호위해 입북했다.
평양에 들어온뒤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으로 金正淑.金正日의 뒷바라지를 맡았던 白鶴林은 6.25때 북한군 5사단 연대장으로 참전했고 54년에 3사단장으로 승진했다.그뒤 蘇聯군사아카데미를수료하고 계속 군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1군단장 (58년),군사정전위원(60년)을 거쳐 金日成호위처장겸 金日成수석부관(61년),호위사령관(65년)등「호위」계통과 사회안전성 제1부상겸 인민경비대 사령관(69년),인민무력부 제1부부장(78년),사회안전부장(86년)등「경찰.군사지휘」계 통에서 일해왔다.
李乙雪은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보안간부훈련대대 대대장.38경비대 대대장을 거쳐 6.25때 4사단 연대장으로 참전했다.그뒤15사단장(53년),蘇聯군사아카데미 유학(56년),5군단 부군단장(59년),5군단장(62년),1군사령관(67 년),총참모부부총참모장(71년),제1부총참모장(76년)등 군사요직을 두루 역임한 전형적인 직업군인이다.
朱道日 역시 6.25때까지는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대대장.참모를 거쳤으며 54년에 소련으로 유학,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58년에 귀국했다.귀국한뒤 연대장(58년),사단장(62년),군단장(65년),집단군사령관(72년),군사령관(78 년)등 전형적인 군지도자 코스를 거쳤고 81년에 인민무력부 부부장겸 군사령관에 임명됐다.
이들의 정치배경은 金日成.金正日과 떼려야 뗄수 없다.
白鶴林에겐 빨찌산부대의 두만강 연안 습격때 위험에 빠진 金日成을 구한 이야기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北滿의 엄동설한에 기진맥진한 金에게 잣을 먹이려고 눈속을 헤치며 산기슭을 헤맨 일화도 北韓에선 꽤 유명한 얘기다.이 얘기는 물론 金日成에 대한충성의 표본으로 선전된다.
그는 1949년에 金正淑이 세상을 뜨자 金正日을 吳振宇.金一의 집에 데리고 다니며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또 61~69년 사이 金日成 호위업무를 수행하면서 金正日의 대학시절과 당중앙에서의 초기정치활동을 곁에서 도와「후계자 」로 성장할수 있게 바탕을 마련해준 인물이기도 하다.金正日이 음향기기.악기류를 좋아한다고 해서 전문가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 물건을 구해올 정도로 金正日과도 떨어질수 없는 사이다.
李乙雪은 69년 1월에 터진 군부 강경파 金昌奉.許鳳學사건 당시 이들을 체포해 문초한 장본인으로 金昌奉.許鳳學의 영향아래있던 고급장교들을 체포,투옥하거나 군복을 벗겨 광산으로 쫓아내는 일을 진두지휘했다.또 金正日후계체제가 출범한 70년대 중반이래 군대안에서 金日成 유일사상체제와 金正日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는데도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포병화력의 현대화,진지의 영구갱도화,특수전부대의 증강과병기의 경량화.현대화,화학무기 증강등 金正日의 군관련「지시」에소극적이거나 주저하는 군지도자들을 반당반혁명분자로 모는데도 중심역할을 수행했다.그는 또 78년 2월의 인민 군당전원회의를 계기로 총정치국장 李用茂,인민무력부 부부장 張正桓,작전국장 任哲등을 비롯한 고급장교들을 金正日후계체제의 반대자로 몰아 광산.농장등지로 추방하는데도 앞장섰다.
한편 朱道日은 현대입체전에서 경보병.저격병부대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중시해 저격병부대 창설및 경보병무력 강화를 주창한인물로 유명하다.군현대화와 군사력강화의 주역인 그 역시 李乙雪등과 함께 69년의 金昌奉.許鳳學사건때 군부내 反金日成세력을 제거하는 일을 도맡았다.또 70년대 중반이래 金正日후계체제 확립에 저항하는 군부지도자들을 제거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처럼 白鶴林.李乙雪.朱道日은 활동반경이 軍에 머무르지 않고金正日후계체제를 지탱하는 일이라면 어디나 나설수 있는 인물들이어서 앞으로도 이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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