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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시>백무산,뒤에서바람부니.유재영,오늘은비비추꽃으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한권의 잡지에 이처럼 이질적인 시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한 경향을 보이는 다수의 시에 둘러싸인 몇몇「미운 오리새끼」들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이것이 과연「백조」로 판명될 것인 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미운 오리」로 클 것인가.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잡지는 바로『실천문학』(가을호)이며 또한 문제삼고자 하는 시들은 이 잡지에 게재된 백무산.유재영씨의 신작들이다.물론「미운 오리새끼」는 유재영씨의 시이며,백무산씨의 시는 여타의 시들을 대표하는 성격을 지닌다.
우선 백무산씨의 시작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그의 시가 다루는소재라든가,문제의식에 대해선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그는 강렬한 언어를 통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여주는 시인이다.적지않은 경우 강렬한 언어는 문 자화되는 순간힘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백무산씨의 시에는 이와같은 일반화가 적용되지 않는다.그의 시는 여전히 강렬한 힘을 발휘하면서 시인의 시적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실천문학』에 실린 다른 어떤 시보다도 그의 시가 특히 주목을 끄는 이유는 여기에있을 것이다.
특히 눈을 끄는 시를 한편 살펴보기로 하자.「뒤에서 바람부니」가 바로 그 것이다.『손님 찾아가면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더니/주인 나오면 극성으로 짖어대고/주인이 말리면 더 큰 용맹 발휘하여/물려고 덤벼드는 저 개는/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에서「개」는 개인 동시에「개와 같은」어떤 대상을 지칭한다.개와 같으면서도 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개를 통해 포착하고 드러내는 시인의 관찰력과 시적 호소력이 특히 돋보인다.
그러나 이 시의 끝부분에 가서 시인은 『이런 인간들이 도처에서콩당콩당 뛰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제까지 유지했던 시적 긴장을 깨뜨리고 있다.이는 조급성의 반영이 아닐까.그에게 시적 변용이 요구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한편 유재영씨의 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실천문학』에 실린 다른 시와 이질적이다.그의 시는 다만 前景化된 언어를 보여줄 뿐이다. 『이,불치의 사랑이 오늘은 비비추꽃으로 슬픔이구나 슬픔을 찾아 슬픔이 오듯 풀잎 하나에도 흔들림은 살아있어 저것이다 저것이다 꽃속에 숨어 황홀한 저것이다』(「오늘은 비비추꽃으로」).이런 종류의 시가『실천문학』에 실린 이유는 무엇일 까.
유재영씨의 이전 시작을 보면 그 이유는 쉽게 확인된다.이제까지그의 시작이 그의 시를『실천문학』에 실리게 한 것이다.말하자면이전의 시를 통해 그의 시는『실천문학』과 인연을 맺고 있지만 그는 현재 강력한 시적 변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이를『실천문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변용이 과연 그가 도달한 종국의 시세계인가에 있다.유재영씨의 이전 시작이 백무산씨의 시에서 확인되는 것과 다른종류의 시적 긴장감을 보이고 있다면 이 변용과정에 있는 시작들은 그러한 긴장감을 쉽게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 변용과정이 단순히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하지않을까.이를 뛰어넘어 이전의 시가 갖는 긴장감을 되찾되 언어에대해 그가 보이는 현재의 관심이 함께 살아 숨쉬게 될때 그의 시는 진정한 시적 영향력을 지니는 시가 될 것이다.
이제 맨 처음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보자.변하지 않는 세계가 변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을 때 그 세계는 보다 강력한 자기 비판적 힘을 갖게 된다.비록 작지만 이질적인 세계를 드러냄으로써『실천문학』은 스스로 자신의 비판력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경렬〈서울大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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