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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마지막 한사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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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매자씨는 아이의 책상에 앉아 볼펜을 들었다.오랜만에 잡아보는펜이었다.그동안 펜을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가계부를 쓴다든가,「오늘의 요리」같은 텔리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필요한재료들을 메모한다든가,제사때 제수를 빠뜨리지 않 으려고 시장 보기전 종이에 미리 적어본다든가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 그런 걸 가지고「펜을 든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렇다.김매자씨는 가계부를 적거나 쇼핑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책상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그야말로 펜을 든 것이었다.그녀는 어떻게든 문장이란 걸 써내려가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김매자씨는 날이 저물길 기다렸다.오랜만에 쓰는 글이니 만큼 주위가 산만해 안될것 같았다.마침 아이는 일찍 잠들었고,남편도 자정이 되어야 돌아온다고 했다.앞으로 서너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문장을 만드는 일에만 골몰할수 있었다.
텔리비전을 끄고 세탁기의 코드도 뽑았다.집안을 돌아다니며 수도꼭지란 수도꼭지는 있는대로 다 꼭꼭 잠갔다.거실과 주방의 불을 끄고,아이의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스탠드를 켜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밤늦도록 공부하던 열여덟살적 소녀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졌다.그리움은 글을 쓰는 분위기를 적당히 고조시켰다.엊그제 일만 같은데 어느새 학부형이 돼 있다니….그녀는 손을 움직여 흰종이 위에 문장을 적어 나갔다.앞 베란다에선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경하옵는 선생님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더위다운 더위도 없이 여름이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가을이 왔습니다.코흘리개 어린 것이 학교에 입학한지 벌써 반년이 넘어버렸습니다.선생님의 따사로우신 보살핌 덕택으로 아이가 부쩍 철이 든것 같습니다.무어라고 고 마움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아이의 담임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진작 쓰려고 했으나 쓸수 없었던 편지였다.망설이기만 하다 그녀는 그만 일학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남들 같으면 적어도 한번 이상은 찾아갔을 학교를 그녀는 가지않았다.이른바 촌지라는 것 때문이었다.봉투라고도 불리는 그것이김매자씨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코빼기도 안비치자니 부모로서차마 안될 말이고,찾아뵙자니 빈손으론 갈수 없었다.차일피일 하다 일학기가 휙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나자 믿을수도 없고 안 믿을수도 없는온갖 심란한 소문들이 그녀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바로 그 촌지에 관한 소문들이었는데 대개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그야말로 기막히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소문이라 는게 으레 그렇듯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경험하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었다.
당하기 그지없는 소문은 끝도없이 생겨났다.악의적으로 만들어냈음에 틀림없는 소문도 없지 않았다.이런저런 소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띠고 있었다.아이가 눈치챌 만큼 교사가 아이를 표나게 소외시킨다는 것.그러면 아이가 집에 와서 부모에게 투정한다는 것.손을 들어도 다른 애들만 시키고 나만 안 시킨다,인사를 해도 선생님이 본체만체 한다,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한다는 것.부모가 낌새를 차리고 학교에 다녀오면 다음날부터 아이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는 것 등등.
그런 얘기를 들으면 김매자씨는 울화가 치밀었다.오래전부터 돈봉투 문제는 있어왔고 사실로 판명되는 일 또한 종종 있었으므로단순히 소문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나도 늦기전에 얼른 학교로 뛰어가봐야지 라는 마음이 들기에 앞 서,누구나 한번씩은 그런 좋지않은 관행을 고쳐볼수는 없을까 고심하게 마련이었다.김매자씨도 마찬가지였다.돈을 앞세우다보면 성의라든가,진솔이라든가 하는 소중한 가치 덕목들이 우리들 공동체 삶에서 실종되고말 터이기에.
그러나 얼마 안가 김매자씨는「방법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가서 따지자니 교사가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을 수 없잖겠는가.오히려 무고죄로 걸려들기 안성맞춤일 뿐이었다.비록 그 증거를 꽉 잡아 고발한다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쟤네 부모가 모모선생을 고발했대 라는 소문이 교사들 사이에좍 퍼질게 분명하니까.고발당한 선생 하나만 촌지를 받아왔다면 또 모르되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내 아이는 또 어떻게 되는가.
극단적일 경우 전학까지 고려해볼 수 도 있지만 다른 학교라고 해서 그 문제에 관한한 뭐 별다를 게 있을까.그럴 바에야 남들처럼 눈 딱 감고….
문제삼고 나설 수도 없고,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애의 교육과장래에 관한 일인데 나몰라라 외면만 할수도 없는,참으로 요령부득 진퇴양난이 아닐수 없었다.김매자씨가 한학기 내내 혼란에 빠졌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일찌감치 담임을 만나고 와서는 마음편하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어머니들이 하나 둘 늘어갔지만 김매자씨는 오래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뭘하자니 뭐가 울고 뭘하자니 뭐가 운다더니,꼭 그런 식이었다.
그러던중 김매자씨에게 참으로 반가운 소식들이 날아들었다.학교가 달라지고 있다는 거였다.새정부에서 새교육 새질서운동인지 뭔지를 벌이고 있는데 무엇보다 이 촌지 수수에 관한 감시.감독을철저히 한다는 소식이었다.
이것이 소문이 아니라 소식인 까닭은 확인할 길 없이 떠도는 정체불명의 말들이 아니라 그 실상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데 있었다. ***지 난 스승의 날,여느해처럼 선생님 앞으로 보냈던손수건이며 스카프며 스타킹 같은 것들이 애들의 손에 고스란히 들려 되돌아왔던 것이다.어느 한 아이의 학급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모든 학급 모든 학교에서 그랬다는 것이 아파트 앞동 뒷동 을 두루 귀동냥해본 결과 드러난 사실이었다.성의를 거절당했다는 서운한 마음이 전혀 안 든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도 잠시,곧 김매자씨는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맛보았다.
김매자씨는 비로소 자신의 진심과 정성이 깃든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구나 기뻐했다.편지라면 누구보다 잘 쓸 수 있다고 자부했으니까.
그동안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한게 얼마나 부끄럽고 가슴 아픈지모르겠습니다.언제부턴가 학부모가 선생님을 찾아 뵙는 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든 선생님에 대한 저의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만 했으나 그러질 못했습니다.이점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이제 선생님을 아무 부담없이 찾아뵐 수 있게 되었으니 자주는 아니더라도 저희 아이에 대한 얘기를 나눌….
김매자씨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편지를 써내려갔다.편지지에 한자 한자 글자를 적어가면서 이토록 할 말이 많았던가 그녀는 스스로도 놀랐다.
이튿날 그녀는 오랜만에 외출복을 꺼내 입었다.너무 화려하지 않으려고 거울 앞에 서서 몇번씩 옷을 바꿔입곤 했다.눈썹을 그리는 걸 제외하곤 일체의 색조화장을 피했다.핸드백도 수수한 걸로 고르고 안에다 어제 저녁에 쓴 편지를 넣었다.
『학교에 가시려구요?』 시동생이 현관에서 신을 신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죠?』 김매자씨가 되묻자 시동생은 빙긋 웃었다. 『외출복 입고 핸드백에 봉투를 넣었다,그럼 학교에 가는 거아닌가요?』 『삼촌도 참.삼촌도 이젠 그런 생각 버리세요.학교에 간다고 모든 학부모가 돈봉투를 들고 가는 건 아녜요.이제 시대가 달라졌다는 걸 아셔야지.』 『시대가 달라지다니요.그건 신문 또는 텔리비전에서나 하는 얘기지 사실은 달라진 게 하나도없어요.제가 요즘 어떤 곤란을 겪고 있는지나 아세요.글쎄 들어보세요.슈퍼마킷 주인이랑 저녁에 술 한잔 하는데 누가 와서 차좀 잠깐 빼달라고 하더라구요.1m만 앞으로 빼면 된대요.그래서술집에서 나와 시동을 막 걸었는데 경찰이 불쑥 나타나더니 음주운전입니다,이러는 거예요.더럽게 걸린 거죠.형수님도 알다시피 제가 면허정지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돈은 고사하고 남들한테 거래처 다 빼앗긴다구요.』 시동생은 된장이며 간장 따위를공장에서 주문해 슈퍼마킷이나 소매점에 직접 납품하는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자신은 경찰의 덫에걸려 들었다는 것이다.10만원인가를 꺼내주며 사정했더니 경찰이어이가 없어 웃더란다.종종 찾아뵙고 사례하겠노라 통사정했더니 겨우 풀어주었는데,요즘은 집에까지 전화를 해 간장이니 된장이니명란젓같은 게 필요하다고 뻔뻔하게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삼촌 잘못이에요.어쨌든 술을 먹으면 차에 오르지 말아야 한다구요.경찰한테 돈을 준 것도 결국 삼촌이 자신의 손해만을 어떻게든 줄여보자는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 아니었나요? 자기의 이익을 잃기 싫어 그랬을 뿐이라는 거죠.잘못을 했으면 떳떳하게 처벌받으려고 하지 않는데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라구요.
물론 경찰이 잘했다는 건 아녜요.하지만 주지 않으면 받을 사람도 없어지는 거라구요.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에요.우리가 달라지지 않는한 세상은 결코 달라지지 않아요.』 김매자씨의 말에 시동생은 머쓱해졌다.그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그때 김매자씨가 잠깐만요 라고 그를 불러 세웠다.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긴데요.삼촌은 그 경찰 한 사람을 보고전체 경찰이 그렇다고 믿고 있어요.많은 시민들이 그런 방식의 사고를 갖고 있는데 아주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거예요.그 반대일 수도 있잖아요? 다들 안그런데 딱 그 한 사람만 아직 그러고 있다,그 사람만 마지막으로 개선되면 이제 우리 사회는 완전하게 건강해진다,이렇게 희망적으로 생각하잔 말이에요.』 말을 하면서 김매자씨는 스스로 놀랐다.내가 이런 생각까지 품게 되다니.사실 그동안 그녀는 그놈의 촌지 때문에 무척 암울한 생각에 줄곧 빠져 있었던 것이다.과연 세상은 이제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학 교를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아이의 담임이 자기 또래의 여선생이어서 김매자씨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봉투에는 돈이 아닌,정성과 진심을 담은 편지가 들어 있었으므로 건네는 데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김매자씨는 겉봉에 예쁜글씨로「존경하옵는 선생님께」라고썼던 것이다.대개의 돈봉투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있지 않게 마련이었다.이만하면 선생님도 단번에 눈치 챌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신중한 눈길로 김매자씨의 얼굴과 봉투를 바 라보던 담임이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런 것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담임은 편지를 거절했다.김매자씨가 영문을 몰라하는 사이 수업시작 종이 울렸고,담임은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쪽으로 급히 가버렸다.머지않아 김매자씨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봉투에 든 것이 돈이 아니라 편지라는 사실을 말로 정확하게 밝혔어야 했던 것이다.낭패라는 기분이 들었지만 담임이 굉장히 청렴해보여 금방 마음이 놓였다.
김매자씨는 복도에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저 선생님,뭘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사실은 이,이게 촌지라나 뭐 그런게 아니고요.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펴,편지예요.예.』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향하는 담임을 따라 붙으며 김매자씨는 어눌하게 말했다.아랑곳않고 발걸음을 옮기던 담임이 김매자씨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곤 김매자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안 받은 겁니다.』 김매자씨는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며 휘청거렸다.그녀는 복도의 창틀을 부여잡고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복도 저만치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담임의 뒷모습이 보였다.김매자씨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런 교사가 딱 한 사람 남아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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