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따스한 선율로 신기입증-기돈 크레머 바이얼린연주를 듣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슬쩍 맛만 보거나 꿀꺽 삼켜버려도 좋을 책이 있는가 하면 꼭꼭 씹어 음미해가면서 소화해야 할 책도 있다』고 베이컨은 말한바 있다.연주 또한 마찬가지다.책이건 연주건 맛만 보고 말거나 꿀꺽 삼켜버려도 좋을 것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나 많다.그런데 14일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진 기돈 크레머의 연주는 잘 음미해볼수록 묘미가 있는 연주였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기교적인 작품을 즐기는 연주자」로 인식하고 있다.사실 그는 로흐버그의『카프리스』에서 그가 모든 바이얼리니스트중 가장 뛰어난 기교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크레머의 전부랄 수는 없고 그에게는 많은 베일이 있다.그의 초절대적 기교라는 겉보기의 의상속에는 고독이 숨어 있었고 얼핏 듣기에는 좀 시린듯 냉랭한 소리에도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가령 모차르트의 소나타에서는 모차르트 특유의 우수를 바탕에 깔면서도 부드러움과 따스함,노래와 유머,밝고 환한 투명이 어울려 있었다.
이날 공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서 초연된 아르보페르트의『프라트레스』였다.음률을 통한 정적의 창조와 고도의 기교를 통해 구현된 그 아름다운 작품에서 크레머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톤과「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묘유묘무(妙有妙無)의 오묘함으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날 공연에서 또 하나 즐거웠던 일은 바딤 사하로프의 피아노독주(모차르트의 환상곡 d단조)를 들을수 있었던 점이다.크레머가 그를 반주자로 생각하지 않고 듀오(Duo)의 대등한 동반자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쿵후터치」의 진 수를 보여준,참으로 유연하고 훌륭한 연주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