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노동인권회관소장 김문수-18년만에서울대복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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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그동안 녹슬었던 머리를 캠퍼스의 시원한 공기로 말끔히 씻어내야죠.』 民靑學聯사건으로 제적된지 18년만에 서울대캠퍼스를 다시 밟게된 위장취업(?)1호 金文洙씨(42.노동인권회관소장.
前민중당노동위원장.경영4)는 가슴 설레기만하다.
民主黨 元惠榮의원(41),張琪杓씨(47.前민중당정책위원장)등서울대 시국관련 제적생 1백58명이 지난 3월 정부의 복적조치로 재입학이 허용돼 2학기 개강과 함께 1일 그리던 캠퍼스로 돌아가게 된 것.
金씨는 경북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69년「3선개헌반대시위」에참여하면서 처음 제적당했다.
『교과서에 나온대로 살려다 제적당했다』는 金씨는 곧바로 복학해 70년 서울대상대에 합격,노원구공릉동 교양학부 캠퍼스에서 첫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1학년때 선배 張琪杓씨등과 만나면서 그의 대학생활은 학생운동과 수배.제적.피신생활로 점철됐다.
그는 71년 10월「교련반대시위」로 대학 첫 제적을 기록한뒤73년 예기치 않던 朴前대통령의 복적조치로 복학했으나 柳寅泰(44).李哲(44)民主黨의원,金秉坤씨(3년前 작고)등과 함께 民靑學聯 사건으로 다시 제적됐다.
그는 용케 검거되지 않았으나 피신생활도중 어머니의 부음을 맞아 뜻하지 않은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전력은 학생운동보다 노동운동을 통해 만들어졌다.71년 여름방학때 구로공단에서 미싱공으로 일한 것을첫 경험으로 72년부터 청계천에서 재단사보조,75년 제적당한뒤에는 자동차정비공등을 전전하다 76년 한일도루코 에 보일러공으로 정식입사하며 본격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했다.
『저는 위장취업자는 아닙니다.제이름으로 정식입사했으니까요.』그는 당시『재단사보조의 월급이 하루 16시간근무에 1만원밖에 안돼 보일러공으로 전업했다』며 노조가 하루하루 급성장하는 모습에 즐겁게 일했다고 한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에 선출돼 와해된 노조를 재조직하고 80년「5.17」때는 삼청교육대상자로 다시 피신생활하는 등 수많은고초를 겪었지만 81년 「서울노동운동연합」건설,87년「5.3인천사태」,민중당건설등 현대사의 주■사건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는『세대가 변해 이전처럼 복학으로 고민하는 동지가 없더군요.새로운 학문으로 스스로를 정비할 좋은 기회입니다』라며 이미 교수가 된 친구들,젊은 후배들과 함께 할 캠퍼스생활을 기대했다. 〈辛聖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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