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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16.80년 삼청교육대 입소 정충제 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鄭忠濟씨(45.경남진주시)는「三淸교육」으로 인생이 달라진 사람이다. 鄭씨가 이른바「저인망 司正」에 걸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것은 5共 출범기인 80년 8월2일.당시 부산 모국민학교교사였던 그는 방학중 집에서 쉬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2명의 괴한(?)에 이끌려 집을 나간뒤 그대로 삼청교육대에 입소한다 .죄목은「문제교사」라는 것.70년 진주교대 졸업과 함께 시작한 그의 교사생활은 여기서 끝난다.
『육성회비 강제징수,2중 경리장부 작성 문제등으로 가끔 교장.교감에게 책상을 치며 격하게 대들기는 했지만 교직을 천직으로알았습니다.학생들을 매로 다스려야 할 때에는 내 종아리를 먼저치고 아이들을 때리는 식으로 시종일관 성실과 정 열로 교단을 지켰습니다.』불의와 권위주의를 체질적으로 참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자신은 아주 평범한 국민학교 선생이었다는게 鄭씨의 회고다. 鄭씨의「인생 2期」는 삼청교육대에서 시작,그 후유증에서 벗어나던 87년 초겨울까지 이어진다.그는 삼청교육대 생활을 한마디로『짐승만도 못한 것이었다』고 말한다.鄭씨는 87년 民敎協(전교조 전신)사람들과 어울리다 우연한 기회에『삼청교 육대,악몽의 363일』이라는 자전적 수기를 집필하게 된다.81년 7월30일 삼청교육대 출소후 책을 쓰게 되기까지 그는 극심한 대인혐오증과 대인공포증에 시달리며 폐인같은 생활을 한다.
전방 이곳 저곳의 군부대를 옮겨다니며 그가 받고 목격한 삼청교육은 그후 체험자들의 폭로로 드러난 다른 삼청교육대의 실상과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자살을 결심하고 또 살아야겠다는 오기를 교차시킨 끝에 출소하지만 삼청의 흉흉한 그림자는 鄭씨 곁에 오히려 더 짙게 드리워진다.
그의 눈빛은 사진대조로도 확연히 구별될만큼 살기와 광기를 발산했다.그의 아내가 무서워할 정도였다.출소후 만6년동안 그는 매일 소주를 퍼마셨고 툭하면 싸움질에다 집안팎의 기물을 파괴하는등 진짜(?)삼청교육의 대상처럼 사람이 1백80 도로 싹 변했다. 鄭씨가 이런 사람아닌 사람생활을 청산한 것은 87년 겨울 재야단체인 민교협에 운전기사로 취직해 일하다가 한 해직기자의 주선으로『말』지에 자신의 삼청체험을 연재하면서부터.
鄭씨는 이어 내친김에 체험수기를 쓰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인세로 아파트 한채쯤 구입할수 있는 돈을 손에 쥐었다.
『생전 편지쓰기도 게을리했는데….』그는 이 때 자신에게 내재돼있던 글재주를 새삼 발견한 것이다.
鄭씨가『실록 정순덕』이라는 빨찌산 다큐멘터리를 쓰기로 결심한것도 이 시기였다.그는 이 전초작업으로 부산일보에「지리산은 통곡한다」는 연재물을 88년 말부터 6개월가량 쓰기도 했다.한때죽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정순덕과 한동안 같이 생활하며 그는 3권짜리 책을 90년 초 탈고했다.
그는 이 기간에 벌어둔 돈으로 아예 지리산 동쪽자락에「月明山房」이라는 거처를 마련,전업작가로 변신했다.사람들과 교류를 최소화하고 하루종일 읽고 쓰는 것이 요즘 그의 생활의 전부다.지금 작업중인『소설 청학동』은 원고지 2천장쯤 나갔 다.
鄭씨는『평범하게 국민학교 교사로 나이가 먹었다면 세상을 보는눈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만큼 많이 알고 깊이 볼 줄 아는 사람으로 변모했다.독서와 사색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국민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더러운 것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복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죠.』이런 주문을 하는 鄭씨의 눈이 빛을 발했다.
〈金昶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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