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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측근 세력|정치 경제 기관 (1)|신세대 선두 주자 강성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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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북한의 행정 경제 기관에서 일하는 김정일 측근으로는 단연 정무원총리 강성산이 선두 주자다.
강성산은 전 총리인 연형묵·이근모와 함께 북한 경제를 진두 지휘해온 경제테크너크랫으로 김일성·김정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아왔다.
1931년 청진시 경성군에서 출생한 그는 김일성과 이종사촌간으로 만경대 혁명 학원 등을 거쳐 체코 프라하공대에 유학한 엘리트다.
강은 다른 김정일 측근들과 마찬가지로 북한 권력 투쟁사에 얼룩진 「반 종파 투쟁」 (56년 연안파, 56∼60년 소련파, 67년 갑산파, 69∼70년 군부 강경파) 때마다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그 뒤엔 김정일의 후계자 옹립에 앞장섰다.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평양시당 책임자로 발탁돼 새 세대의 맨 앞줄에 서게 된 인물이다. 오랫동안 핵심 당료로 일하던 그가 행정 경제 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75년쯤이다.
74년6월에 열린 평양시당 전원 회의가 계기가 됐다. 이 회의는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동생인 김성갑 (당시 해군사령부 정치위원)의 「평양시당 조직 비서 시절의 비리」가 폭로된 자리였다. 김성애 측근들은 이 회의 직후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성산은 당시 시당 책임자로 전원회의를 이끌었으나 정작 이들의 비리를 당 중앙에 사전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시당 책임 비서에서 물러나는 비운을 맛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은 「능력 있는 인척」 강성산을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책임 추궁과 동시에 슬쩍 행정 경제 관료 (정무원 부총리)로 배치하는 동급 조정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강은 그 뒤 행정 경제 기관의 핵심 인사로 성장해 74∼75년의 정치적 좌절을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강성산에게 스폿라이트가 집중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84년1월 열린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 자리였다. 그는 제1부총리 자격으로 「남남 협력 (제3세계와의 협력)과 대외 경제 활동을 강화하고 무역 활동을 더욱 발전시킬데 대하여」라는 주요 보고를 한 뒤 이 회의에서 총리로 선출됐던 것이다. 그의 보고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 교류 적극화」를 주장한 이례적인 것이어서 북한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자연히 전문가들은 그의 총리 취임을 「대외 경제 활동 강화를 위한 포석」으로 분석했다. 북한에서 강성산이 총리로 부상한 뒤 중국 경제 특구에 대한 신중한 태도에서 벗어나는 주목할만한 변화들이 나타났었다.
▲84년2월 김영남 외교부장의 심천 경제 특구 방문 및 전자계기공업중심지·사국공업지구·항만 건설장 등 견학.
▲84년6월 북한 정부 경제 대표단 (단장 정송남 대외 경제 사업 부장)의 3주간 경제 특구·상해 시찰.
▲84년8월5∼10일 강 총리의 북경·상해 (세탁기 공장·포장 공장·아동 식품 공장·내의 공장 등 경공업 공장) 참관.
▲8월3∼5일 노동당 대표단 (단장 계응태 평남도당 책임 비서)의 심천 경제 특구 방문 등.
연이은 주요 간부들의 중국 시찰 끝에 북한은 84년9월 처음으로 「합영법」을 채택, 시행에 들어갔다. 「합영법 시행 세칙」 「합영 회사 소득세법」「외국인 소득세법」도 같은 해에 마련됐다. 그해 12월에는 정무원내의 「대외 경제 위원회」도 설치되었다. 정책 전환의 배후에는 김정일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성산은 86년12월 갑자기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비서로 자리를 옮겼다 (후임 이근모). 이를 두고 「성급한 경제 개방에 대한 우려」 「중공업 노선으로의 복귀」 후 북한의 소련 접근에 따른 친중파의 실각」 등 추측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총리 해임 후에도 「정치국원·비서」로 계속 활발하게 활동했고 당내 서열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정황은 총리 퇴임을 문책성 인사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 뒤 강은 88년3월 함북도당 책임 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취임했다. 91년 표면화된 「나진·선봉 자유 경제 무역 지대」 개발 계획도 함북 책임자인 강성산의 몇년간 준비 끝에 탄생된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그동안 그는 90년5월9∼21일간 당 대표 단장으로 방중 해 북경과 지방을 돌아봤다. 이것 역시 대외 개방의 준비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인민일보 (90년5월12일자)는 강이 강택민 총서기와 만나 「개혁·개방 정책을 칭찬했다」는 의미 있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작년 9월4일 김일성은 갑자기 「노동당 함경북도 위원회 전원 회의 확대 회의」라는 회의를 소집했다. 김일성은 회의 결론에서 「함북에서 최근 수년간 당의 경제 정책 관철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성과가 이룩된 것에 큰 만족의 뜻」을 표명했다고 한다. 단적으로 강성산의 행정 경제 능력을 칭찬한 것이다. 강성산의 총리 복귀도 김일성의 이 시찰 때 결정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뒤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는 92년l0월5일자로 「외국인 투자법」 「합작법」 「외국 기업법」 등을 채택, 자유 경제 무역 지구에 1백% 외자 기업도 허가하는 획기적인 방침을 확정했다. 「자립적 민족 경제」를 정책 기둥으로 삼아 대외 개방을 잔뜩 경계해온 북한으로선 고삐를 늦추는 중대한 정책 전환을 한 셈이다. 이 전환은 「김정일 시대」를 순탄하게 맞기 위한 고육책인지도 모른다.
전반적인 경제 사정과 외화 사정이 어려운 북한으로선 대외 개방이 불가피하다는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따라서 북한이 작년 12월 ▲강성산 총리 재등장 ▲부총리 김달현·당 국제부장 김용순의 정치국 후보 위원 승격 등의 인사 조치를 취한 것은 대외 개방의 포석으로 보여 주목된다.
특히 강성산이 처음 총리가 된 1984년이 2차 7개년 계획의 최종 연도였는데 3차 7개년 계획의 최종 연도인 올해를 앞두고 그가 다시 총리에 기용된 것은 의미가 크다. 그는 84년 당시 계획을 수행한 뒤 3차 7개년 계획 (87년)까지의 2년간의 조정 기간에 총리직을 수행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경제 계획의 차질을 감당해야할 책임을 짊어진 강 총리가 대외 개방의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큰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대외 개방」을 통해서도 예상만큼 경제 효과를 얻지 못할 경우 총리가 다시 교체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김정일 후계 체제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통일부=김국후 차장·유영구·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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