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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농촌 발목잡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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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의회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다간 나라 모습이 더욱 찌그러들지 않을까, 국민은 외톨이가 되고 생활도 궁핍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쌓여만 간다. 비리에 연루된 국회의원이 줄줄이 잡혀가서도 아니고, 지방의회 의원들의 부정이 늘어나기 때문만도 아니다. 농업과 농촌문제를 다루는 의회의 자세가 농민의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사탕발림 정책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정말 큰일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난주 국회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킨 행동파 의원들의 면면을 보자. 그들은 시대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한다며 경제.사회 시스템의 전환을 촉구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몇몇 의원들은 주요 당직자로서 국회를 호령하고 행정부를 주물렀던 사람들이다. 토론의 장에서 국가 이익을 논하고 이제 앞을 보며 일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FTA 비준 동의안이 농촌을 피폐화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의정단상을 점령하는 데 앞장섰다. 그렇게 해야만 4월 총선에서 버림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원칙도 소신도, 그리고 과거 당직자로서의 명예와 체면도 다 팽개친 모습이다.

요즘 수도권을 제외한 각 도의회가 관내 학교의 급식에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농산물을 사용하자는 농민단체 목소리를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듣고 있다. 소비촉진과 소득 증대 대책치곤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그 첫번째 움직임으로 전북도 의회가 최근에 학교 급식 조례를 제정하고 말았다. 전북 지역에서 생산된 우수 농산물만을 학교 급식에 사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조례를 만들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의 득표 활동은 보나마나라는 분위기가 지역마다 팽배해 있다. 이러다간 농산물 유통을 둘러싸고 각 도 간의 분쟁과 마찰이 생기고 지역 간 경제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농업.농촌문제를 다루는 지방의원들의 자세가 국회의원들과 사뭇 경쟁적인 국면으로 변모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농민단체 움직임에 동조해야 선거에 도움이 되고 다음 의정활동도 계속할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이 깔려 있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들은 농민단체의 의견을 충분히 소화한 후 개방시대의 농촌시장이 대응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실행하며 설득하는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짧은 의회와 의원들이야말로 오늘의 농촌발전을 저해하는 1차 장애물이다.

이 나라 국회의원들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추곡수매가 동의제를 갖고 있다. 시장경제를 주창하는 나라의 국회가 특정 상품의 가격을 통제한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이 제도로 인해 농민 소득이 증대됐다는 증거는 없다. 시장여건의 변화로 실효성조차 없어졌다. 그런데도 국회는 동의제를 폐지하지 않고 있다. 추곡수매가를 이렇게 올렸노라고, FTA도 반대했노라고 유권자들에게 자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지방의원들은 해당지역 농산물 사용을 위해 배타적인 급식 정책을 선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가까운 장래에 농민들과 그들 자녀의 일상생활에 어떤 난제가 생길지 그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농산물 공급과잉 시대의 도래로 농업과 농업인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문제가 이 시대의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이제 토론의 시기도 끝났다. 모든 성공적인 영화는 라스트 신이 좋아야 한다면서 아름다운 은퇴를 준비하는 박관용 국회의장의 2월 FTA 동의안 처리를 우리는 주목한다. 국익이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지방의회 의장들도 국회의장으로부터 한 수 배우며 짧은 생각들을 버릴 것이다. 진실로 농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은 그들이 부닥치게 될 앞날을 걱정해줘야 한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