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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승부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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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04면

중앙포토

노무현 대통령은 올 초 청와대 참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지도자도 인간인 만큼 개인적 흠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통찰력, 창의력, 용기 세 가지는 갖춰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우리 정치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뿐이다.”

노 대통령은 평소 DJ를 김구 선생 다음의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꼽아왔었다. 결벽증처럼 가는 곳마다 자신을 낮추고 DJ의 치적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남북관계는 김 전 대통령이 설계해놓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2004년 6월, 6·15공동선언 4주년 토론회), “사실 인권지도자이자 남북관계의 방향을 잡은 김 전 대통령 덕분에 내가 외국에 다니면서 대접을 잘 받는다”(2004년 12월 런던 동포간담회)는 식이다.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DJ는 노 대통령에겐 늘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전임 대통령의 치적이 후임자에겐 오히려 부담이라는 것은 권력의 일반 공식이다. 무엇보다 범여권, 진보진영 내에서 ‘남북 화해교류의 선구자’라는 상징은 노 대통령이 따라잡기 버거운 DJ만의 카리스마였다.

노 대통령이 2003년 3월 취임 직후 내린 첫 결단은 바로 DJ 시절의 정상회담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 수용이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전임자의 ‘과오’를 정리하고 갔던 우리 정치의 전례가 반복된 것이었다.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노 대통령의 정치인생 중 아마도 가장 고민했던 순간일 것”이라며 “그러나 거대 야당이 국정조사까지 외치는 터라 털고 가자고 결심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DJ의 정상회담 치적을 ‘훼손’한 대가는 혹독했다. 당시 폭락한 호남의 지지율은 사실상 노 대통령의 ‘탈(脫)DJ 홀로서기’ 시도였던 민주당 분당, 열린우리당 창당을 거치며 더욱 악화돼 노 대통령의 힘을 빼는 주 요인이 되었다. 최근까지도 노 대통령은 전임자의 진한 그늘에 가려 있었다. 범여권 지지자들에게 DJ와 노 대통령의 대선 영향력 우열을 묻는 질문(중앙SUNDAY 6월 조사)에 68.7%가 DJ의 손을 들어준 반면 현직인 노 대통령은 24.6%에 그칠 정도였다. 노 대통령의 한 핵심 참모가 “존경의 정도만큼 노 대통령에겐 ‘DJ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이유다.

2005년 2월 북한의 핵 보유 선언에서 지난해 10월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처했을 때 노 대통령에게선 이런 한탄까지 나왔다고 참모들은 기억했다.

“내가 이렇게 방어해주는 데도 김정일 위원장은 한 번도 유연한 모습을 안 보여주니…. 여당에선 자꾸 정상회담 하라고 그러지만 누군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느냐. 남의 속도 모르고 참….”

우여곡절 끝에 노 대통령이 거머쥔 ‘8·29 평양 정상회담’ 카드는 그래서 다양한 상황의 변화를 전망케 해준다. 그가 범여권 내 주도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을 것이란 진단은 공통적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는 “모든 대통령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며 “정상회담은 노 대통령에겐 DJ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온 범여권 내 영향력을 뒤집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정상회담 자체는 물론 대선 과정, 임기 말까지 회담의 합의를 이행해가는 상당기간 동안 노 대통령은 이슈를 선점하고 주도할 환경을 확보했다”고 진단한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직후 DJ의 지지도는 10% 이상 상승했었다. 근 1년 동안 합의 이행을 논의하기 위한 장관급, 국방장관, 장성급 회담 등이 봇물을 이루며 남북관계 이슈가 정국 전반을 지배했던 게 사실이다.

유 교수는 “특히 ‘경제’로 상징되는 한나라당에 대응할 이미지가 부족했던 범여권에 ‘평화’라는 이슈를 제공하면서 노 대통령이 범여권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의 위상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벌써 이해찬 전 총리 등 친노 주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한나라당과의 세 격차를 좁힐 수 있지 않겠느냐는 범여권 전반의 기대감이 높아진 상황이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진보진영 전반에서의 노 대통령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도 관심거리다. 이라크 파병과 대연정 제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노 대통령은 그간 진보진영에선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번 8·29 정상회담에선 우선 보안법 폐지, 북방한계선(NLL) 재설정 문제 등 체제·이념 논쟁을 부를 뇌관이 적지 않다. 더욱이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 ‘남북 경협’을 우선시하려는 현 정부와 남북 정상회담의 ‘6자회담 기여’를 중시하는 미국 정부 간의 미묘한 반미적 요소도 뒤섞여 있는 국면이다.

북한 문제가 보수·진보를 나누는 가늠자가 되어온 터라 이 같은 정상회담의 결과와 파장에 따라선 범여권의 ‘반(反)한나라당 대연합’ 전선이 ‘반(反)보수 대연합’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그간 이완되어 있던 남북관계가 정상회담을 계기로 반대와 찬성의 정치세력 재편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퇴임 후 정치활동을 예고한 노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소수파 세력 기반을 감안할 때 친정인 진보진영의 인정이 필수조건이다. 그가 정상회담 프리미엄을 활용해 DJ 이후 진보 정치세력의 주도권 회복을 꿈꿀 법한 환경을 맞은 것이다.

관건은 정상회담의 결과다. 장훈 교수는 “공허한 수사(修辭)만 주고받아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거나 차기 정권이 감당하지 못할 합의라는 과욕을 부릴 경우 모두가 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으로 증폭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4억5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성사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허상을 지켜봤던 국민들의 시선도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다. 반전을 노린 모든 승부수가 그렇듯 한순간의 판단착오가 노 대통령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는 게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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