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용산은 무서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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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25면

용산에 갔다. 목적은 무조건 휴대전화를 바꾸는 거다. 사용하던 VK의 초슬림 모델은 가볍고 얇은 데다 쓸모없는 기능이 없어서 좋았다. 한데 1년을 썼더니 가볍고 얇은 게 더 불편했다. 전화로 인터뷰를 하는 일이 잦은 직업상 어깨와 귀 사이에 전화기를 끼고 손으로 타자를 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탓이다. 카메라 기능 따위는 필요없다고 무심한 듯 시크한 척했었으나 실은 셀카도 못 찍는 게 은근히 불만이었다.

김도훈의 쇼퍼홀릭 다이어리

고장이 종종 발생하는 모델인데도 AS를 받지 않았더니 가끔 저절로 꺼지는 것도 성가시다.
회사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1970년대식 모더니즘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한 전자상가다. 따라간 동료가 휴대전화 상가로 들어가기 직전에 비장한 얼굴로 용산 쇼핑수칙을 몇 개 일러준다. 첫째, 그냥 구경하러 왔다고 말하라. 둘째, 절대로 긴장한 표정 짓지 말라. 셋째, 얼마까지 보고 왔느냐는 말에 절대 가격을 말하지 말라. 넷째·다섯째 수칙을 중얼거리며 상가로 들어서자마자 수십 명이 굴리는 수십 개의 눈이 날아와 동공에 박힌다. 뭐 사러 오셨어요. 한번 보고 가세요. 구경만 하세요. 그냥 물어나 보세요. 너희들이 내 주머니를 노리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부러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가장 가까운 매장으로 들어갔다.

“뭐 찾으시는 거 있어요?” 그렇지. 첫 번째 수칙. “구경만 하려고요.” 진열장을 들여다본다. 젠장. 한눈에도 마음에 쏙 드는 게 있다.
일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서 만든 LG의 캔유 CANU701D. 키패드와 화면이 큼지막해서 좋고 미니멀한 디자인은 원하던 그대로다. 원래는 30만원이 넘는 모델이란다. 하지만 번호이동을 하면 14만원에 주겠다는 말에 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또 다른 호객꾼들에게 시달리는 건 죽기보다 싫다. 구입을 결심하자 계약서가 눈앞에 펼쳐지고 알아듣지 못할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일단○○요금제를쓰셔야하는데요이건○달약정이니까꼭하셔야14만원에드릴수있고요사용안하시면가입이아예안되는거아시죠한달에3만원이상쓰신다니까이요금제가아무리봐도이득이네요.”
쉼표 없는 점원의 말이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이런저런 문서 뭉치들이 속속 등장한다.

“꼭할부를하셔야하는데요할부보증료를만원내셔야하고요선수금이일단은들어가야하는데원래이건다돌려받으실수있는거예요.”
다한증이 있는 터라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진다.
“여기랑저기랑요기랑거기랑다음장의여기랑거기랑저기랑고기랑그렇게사인좀해주세요.”
사인을 하는데 손에서 볼펜이 자꾸 미끄러진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사인을 못하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으로 얼마 전 TV에서 들은 문장이 소용돌이친다. 손님 맞을래요? 손님 맞을래요? 맞을래요?
맞을래요? 맞을래요? 맞을래요? 맞을래요? 맞을래요?

결국 14만원에 몇 만원을 여러 가지 이름의 계약금으로 붙여서 낸 뒤 무수한 사인을 하고서는 숨을 헉헉거리며 용산을 탈출했다. 휴대전화 청구서를 받은 건 몇 주가 지나서였다. 휴대전화는 마음에 들지만 홀린 듯 강제로 가입한 요금제는 아주 비쌌다. 소심한 다한증 환자에게 아직 용산에서의 대범한 쇼핑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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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씨는 글을 쓰고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는,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선 쇼핑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씨네21’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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