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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문제 의식적으로 보고 꺼려|15기 소장 때 중장으로 "파격진급"|25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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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완벽주의 자세는 청남대 건설, 연희동 사저 증축, 전직 대통령 경호규정 제정의 추진으로 이어졌고 그후 상당부분이 5공 비리의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완벽경호를 위해 지방 5곳에 1년에 기껏 1∼2번 사용하는 「지방청와대」를 건립, 막대한 예산을 낭비했다.
『물론 장 실장 시절엔 차지철 실장 때의 월권은 없었습니다. 전대통령이 꽉 틀어잡고 국정을 운영했으니까요. 그러나 장 실장에의 신임이 대단하니 권력의 추가 그에게 쏠리게 마련이었지요. 박준병의 보안사나 노신영의 안기부도 미묘한 국정문제는 장 실장의 경호실과 사전에 상의했지요. 전대통령 역시 비밀을 요하는 것이나 민감한 문제는 비서실장(함병춘·강경식)이나 정순덕 정무1수석을 시키기보다 장 실장에게 임무를 주었지요. 2·12총선 공천과정에도 깊이 개입했습니다.』(W씨)
장 실장은 전대통령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으나 전경환씨의 새마을운동 등 친·인척 문제는 의식적으로 소홀히 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과외선생까지 섭외>
대통령의 심기를 직접 거스르는 직언을 피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여기에는 허화평·허삼수씨의 몰락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일부에서는 추측한다.
이 문제에 대해 장 실장 자신은 『직접적으로 대통령에게 직소하기 보다 어떤 정보나 첩보를 본인들에게 확인케 함으로써 자제토록 했다』고 한바 있다.
쉽게 말해 새마을운동에 문제가 있을 때 전대통령에게 보고하기보다 경환씨에게 「여론이 이렇다」고 알려주어 주의를 환기했다는 얘기다.
『그런 것이 대통령이 기분 나빠할 일은 피하는 장 실장의 한계였지요. 물론 이학봉 민정수석 책임이기도 하지만 충복이라면 강력하게 건의했어야 했지요. 두 허씨가 물러나간 뒤 친·인척문제를 권부내 어느 누구도 거론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장 실장으로선 아픈 대목입니다.』(청와대비서관 출신 F씨)
전대통령에 대한 장 실장의 보좌는 오래 전부터 사적인데까지 미쳤기 때문에 이린 스타일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장군시절 전대통령이 자녀 재국군과 효선양을 과외공부 시킬 때 「어떤 선생님이 실력이 있더라」는 정보를 알아오는 것 등 집안 문제에도 장 실장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70년 전 대령이 백마29연대장으로 월남에 갔을 때 세번째 참전해 악바리란 별명을 들은 장 소령은 정보주임으로 베트콩과의 전투는 물론 연대장숙소 당번법의 임무까지 확인했다.

<「호골 곰탕」끓여 진상>
『그때 경계근무중인 사병들이 정글에서 호랑이를 한 마리 잡았다지요. 호랑이 뼈가 몸에 좋다고 해서 사단장한테도 보내고 장 실장이 아이디어를 내 연대장의 건강을 위해 「호골 곰탕」을 끓였다고 들었습니다. 전대통령이 당시를 회상하곤 「음식에서 냄새가 나 못 먹었다」고 한 적이 있었지요. 장 소령은 작전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베트콩 동향 파악에서부터 지휘관의 건강관리까지 맡은 셈이지요.』 (W씨)
장 실장의 이 같은 윗사람 모시기는 체질적인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나 실제 경호업무에 관해 전대통령의 비위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전대통령은 76년6월부터 1년7개월간의 경호실 차장보, 이전에 수경사 30대대장을 지내 경호업무에 관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공 초기 전대통령은 경호실의 월권과 궤도 이탈을 늘 경고했다. 『차가 경호실장 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중장·소장들을 경호실에 데려다 놓고 권력암투를 벌였다』고 예를 들면서 한눈 팔지 말라고 했다.
역시 전대통령의 차장보 시절 그 밑에 있었고 나중에 30경비단장을 지냈던 장 실장은 경험을 공유한 탓인지 이 같은 지침에 충실하려 했다.
이런 방침 때문에 5공 전반기 장 실장의 경호실은 70년대 차 실장의 경호실에 비해 직제와 제도상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는 10·26후 최규하 대통령 때부터 경호실을 관장했던 정동호 실장 때 시작돼 장 실장 시절 정착됐다.
우선 군의 중장·소장이 맡았던 경호실 차장·차장보제를 없앴고 내무·국방·법무·교통·재무장관이 위원으로 참석하고 경호실장이 위원장이 되는 경호경비대책위원회가 폐지됐다. 정 실장시절 경호실가·경호휘장·복장을 바꿨다. 호랑이 세 마리와 독수리를 그려 넣은 화려한 휘장이 위압적으로 보인다하여 무궁화 휘장으로 소박하게 바꿨다.
「유신의 광명 주신 민족의 등대」란 대목이 들어있는 경호실 노래를 「우리는 전하무적 세계최강의 근위부대다」로 끝나는 것으로 고쳤다. 히틀러의 독일SS친위대원 같은 복장을 바꾸는 등 경호실 분위기를 새롭게 단장하려고 노력했던 흔적도 있다. 장 실장의 노력과 성의를 지켜본 전대통령은 그에게 안기부장을 맡길만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84년12월7일 별을 하나 더 달아 예편시켰다. 그러나 장 실장의 중장진급은 군부 핵심의 반발을 샀다.

<안기부 맡기려 예편>
왜냐하면 장 실장의 육사16기는 물론 15기도 아직 소장이었다. 15기의 고명승은 장 실장보다 1년 늦게 동기생 중 처음 중장으로 진급했다. 전대통령은 이런 반발을 감안해 처음에는 쉬쉬했다.
T씨의 비판.
『진급 최저 복무기간에 상관없이 특진시키는 것은 전투시 또는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공적이 현저한 때에 한하지요. 5·17이후 예편시킬 때 별을 하나 달아준 경우가 있었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였지요. 장 실장을 예편시키면서 하나 더 달아줬다고 하지만 결국 편법 진급은 별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지요.』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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