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총리/제역할 찾기 행보 바쁘다/“무소신”오해씻으려 내각챙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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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모든사항 협의 지시… 청와대 직보관행 제동/대북관계·노사문제등 직접 조율 강한 의욕
요즘 총리실에는 업무보고하러 온 장관들이 자주 나타난다. 하루 줄잡아 3∼4명씩은 다녀간다. 총리가 주재하는 각종 회의도 거의 매일 열린다. 20일 노동관계 장관회의를 주재해 현대자동차에 대한 긴급조정권 발동을 결정했고,21일 부실공사 방지대책 관계장관회의와 통일관계 고위전략회의,22일에는 환경보전위원회를 주재했다.
회의는 과거처럼 실무선에서 만든 안을 보고하는 형식에 그치지 않고 종종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지난 15일 국무회의에서는 총리의 문제제기로 택지 개발촉진법 시행령 개정안이 보류됐고,21일 통일전략회의는 세시간의 논란끝에 부처별 안을 더 다듬어 다시 모이기로 했다.
이제 총리실 직원들뿐 아니라 각부처 간부들도 황인성총리가 뭔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황 총리는 15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한 안건도 총리실과 사전에 협의하도록 하라』고 매우 의욕적으로 지시했다. 총리 모르게 청와대와 직거래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장관들에게는 「전화 보고」를 일상화하라고 지시해 바쁜 일정을 핑계삼아 청와대로 건너뛰지 말라고 채근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총리의 위상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기껏 국무회의나 주재할뿐 인사권도,예산권도,어떤 강제수단도 없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과 총리는 한계급 차이지만 그 차는 하늘과 땅』이라고 실토했다.
그래서 총리는 밑이나 위로부터 다 「물」먹는 일이 허다하다.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 명의로 장관에게 지시하고,일을 챙기면 총리는 돌아가는 일을 도통 알길이 없다. 또 장관들은 총리를 제치고 청와대와 직거래하는 관행에 익숙해 있다. 괜히 총리를 경유하다 타부처가 알면 일의 진척만 늦어지고,반대 의견에 부딪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대부분의 장관들은 갖고있다. 때문에 몰래 청와대에만 보고하고 일을 진전시켜 다 만들어진 상태에서 결론만 총리에게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총리가 제구실을 하려면 대통령이 각별히 배려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총리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주 교육부는 전교조문제와 관련해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청와대와 직거래하려다 총리실 안테나에 걸렸다. 황 총리는 노발대발했고,결국 교육부의 안은 취소돼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후 황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청와대 보고사항도 반드시 사전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새 정부 출범 초기 한완상 통일원부총리,김덕 안기부장,한승주외무,정종욱 외교안보수석 등 4명은 통일관계 전략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아예 총리는 빼고 자기들끼리 대북문제를 결정했다.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황 총리도 처음엔 불쾌했지만 눈치를 봤다. 혹시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대북문제에 대한 의견이 중구난방,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황 총리는 대통령의 의지가 그렇지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북문제를 틀어쥐기 시작했다. 모든 대북문제는 총리주재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심지어 대북 서한도 총리가 직접 붉은 펜을 들고 문구를 고치는 통에 오전중 보내기로 한 전통문을 오후에 보낸 일도 있다.
황 총리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김영삼대통령의 지원이 있은 것 같다는게 정부내의 분석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총리에게 힘을 주어 각 부처간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자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김영삼대통령은 지난 13일 청와대에서 국무위원들과 아침을 함께 먹으면서 총리에게 힘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총리가 제 역할을 하려면 대통령의 지원 이상으로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6공 때 강영훈총리는 안기부·국방부가 총리실이 자료를 요구하면 제대로 주지 않고,중요 국정사항을 청와대에만 보고한다고 역정을 낸 적이 있다. 그 바람에 강 총리는 「소신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황 총리가 국회에서 이만섭의장으로부터 무안을 당하고 분해하자 여권 고위인사들이 함께 모여 저녁을 대접하며 달랜 것도 황 총리의 입지가 달라진 것을 대변한다. 노동문제나 대북문제 관련 장관들이 보수적인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한 데에는 황 총리의 영향이 있다. 황 총리는 노사·전교조·한약·남북문제만은 꼭 직접 챙기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의 「제몫찾기」 의지가 언제까지,어떤 강도로 지속될지 주목된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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