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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한번 진 「빚」꼭 갚는다-「전두환 식 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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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두환 대통령은 군대시절 하나회 후배들에게 『삼국지』 『수호지』에 등장하는 「의리의 세계」를 배우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는 『삼국지』의 도원결의 장면을 얘기 할 때면 늘 신이 났고 걸찍한 입담으로 『수호지』의 양산박에 모인 1백8인의 의리의 삶을 찬미했다.

<내가 눈이 삐었지>
전대통령은 군 생활을 하면서 나름의 독특한 의리와 처세로 위아래의 대인관계가 좋았다. 그의 족적을 살펴보면 유비의 처세술, 수호지 두령들의 의리를 실천하려고 나름대로 애쓴 흔적들이 발견된다. 어쨌거나 그는 하나회 후배들로부터 의리의 보스, 처세술의 귀재라는 평판을 줄곧 얻고 다녔다.
이 같은 처세스타일은 집권 후에도 인사나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많이 반영되었으며 87년 노태우 대표를 민정당의 후계자로 결정한 것을 빼고는 대체로 성공했다는 생각을 전씨는 갖고 있다., 지금은 『내가 눈이 삐었지』라고 후회하고 있지만 그는 당시 『유력한 군 출신이 있음에도 후계자로 정하지 않으면 군 후배들에게 의리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선후배들의 압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었다.
정호용·안무혁·이춘구씨, 그리고 12·12때 선배였던 유학성·차규헌씨 등이 「노태우 후계」를 위해 총대를 멨던 사람들이다.
전 대통령은 후일 백담사 귀양시절 「의리의 허망함」에 실망한 나머지「손볼 놈」몇 명 운운했다가 저급의 리더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군대 밖은 물론 군 내부에서도 그의 리더십을 배타적인 도당적 행동성향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패거리두목」이라는 것이다. 전 대통령이 김종필·윤필용·박종규·이후락씨 등 박정희 시대 권력의 한복판을 차지했던 이들과 맺었던 인간관계의 전개과정을 되돌아보면 그의 리더십 실체에 대한 한 단면을 파악하게 된다.
그가 어렵사리 권력의 뿌리를 내린 83년 8월16일. 대한올림픽위원회는 공석중인 한국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위원 후보로 박종규 전 경호실장을 추천키로 결정했다. 형식상 추천권은 대한올림픽위원회에 있었지만 실제는 전두환 대통령이 지명한 것이다. 88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인 각광을 받을 화려한 자리에 박씨를 임명한 것에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씨는 3년전 80년 5·17직후 권력형 부정축재로 재산을 뺏기고 형편없는 인물로 찍히는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런 박씨가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재등장한 것은 정말 의외의 「사건」이었다. 그는 1년쯤 뒤 84년 7월 정식으로 IOC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17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았던 김종필·이후락씨 등과는 파격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하나회만은 그 이유를 당장 알았다. 「전두환식 의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대통령은 박정희 시대 하나회그룹의 후원에 대한 보답을 한 것이다. 전두환과 박종규의 관계는 73년3월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당시 전두환 준장은 많은 하나회 후배들과 더불어 군복을 벗을 위기에 몰렸었다.
하나회 출신 A의원의 회고.
『잘 알려졌다시피 윤필용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사조직하나회를 없애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우리들을 탄압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습니까.

<박 실장 전 장군 구제>
그때 목에 칼이 들어온 전 장군과 하나회를 박 대통령에게 진언해 구해준 사람이 박 실장이었습니다. 사실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 하에 성장해 왔지요. 강 사령관이 「윤 사령관을 손 보라」고 한 박대통령의 지시를 「하나회 소탕」으로 확대하자 전 장군 그룹은 생사의 기로에서 박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호소했지요. 이 같은 호소의 다리를 놓아주고 옆에서 자기 일처럼 하나회를 변호한 이가 박 실장이었습니다. 강 사령관의 월권을 박대통령에게 낱낱이 보고해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시켜 옷을 벗긴 이도 박 실장이었죠.』
3김이 주무른 80년 서울의 봄 시절 기성정치권을 궤멸시킨 5·17직후 전 보안사령관은 박 종규씨에게 호소 겸 부탁을 했다. 구 여권핵심들을 권력형 부정부패로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전 사령관은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형님, 부정축재처벌대상에서 형님을 빼면 우리가 설득력과 공정성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형님을 포함시킬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A의원)
박종규씨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해 강창성씨는 감옥으로 가고 박종규씨는 IOC위원이 된 것이다.
하나회의 대부였던 윤필용씨의 경우는 박종규씨와 달랐다. 5·17이 나자 하나회를 키워준 그의 전력 때문에 윤씨 집에는 당장 사람이 몰리고 중정 부장을 맡을 것이라는 등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5공 7년간 정부요직에 기용되지 않았다. 기껏 도로공사사장에 머물렀고 그나마 국방위회식 사건으로 예편한 정동호씨에게 물려주고 담배인삼공사 이사장직을 맡았을 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전대통령의 선택적 의리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윤씨가 급격치 부상하려 하자 전대통령은 사람을 보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적도 있다. 분명한 상하관계 때문에 전대통령이 가까이 부리기에는 무거워 그랬을 수 있다 대령시절 수석부관으로 모셨던 서종철 육참 총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윤씨에 대한 예우가 소홀했던 것은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신 군부 출신 민자당의원 Q씨의 회고-.
『윤 장군사건의 배경에는 유신직후 권력질서를 새롭게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후락 정보부장과 윤수경 사령관의 밀월을 차단하려는 박대통령의 권력관리 필요성과 친위세력내의 갈등이 작용했습니다. 이 부장은 박대통령의 군대시절 부관이자 자신의 고향(울산) 후배인 육사 11기의 손영길을「미래의 참모총장 감」이라며 수경사참모장에 천거했지요. 윤 장군은 손 참모장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상당히 좋아했지요. 당시 공수1여 단장이었던 전 준장은 이것을 대단히 섭섭하게 여겼지요. 평소 이후락을 부정적으로 보던 윤 사령관이 손영길의 참모장 부임을 계기로 이 부장과 가깝게되자 전 준장은 내심 불안했지요. 그때 마침 박종규도 이후낙과 윤 사령관이 가까워지는 것을 못 마땅해 했지요. 윤 장군이 이부장과 사석에서 박대통령이 노쇠했다고 한 불경 발언이 바로 윤 장군을 박대통령 눈에서 벗어나게 했거든요.』

<윤씨 강등 회복 사신>
11기 중 선두주자로 장래의 참모총장을 오매불망 꿈꿔 왔던 전 준장은 윤씨의 언동이 내심 불만이었던 게 사실인 듯 하다.
10·26직후, 윤씨는 자신이 유죄판결 받아 이등병으로 강등된 것을 회복시켜 달라는 민원을 하나회에 전달했다. 윤씨는 이들을 만나 직접 부탁하는 것이 쑥스러웠던지 노태우 9사단장에게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노사단장은 전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Q씨의 이어지는 증언.
『윤 장군은 전씨에게 함부로 얘기하지 못했지요. 노씨는 쉽게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노장군의 보고를 받은 전 사령관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어요.이런 중요한 시기에 사사로운 문제나 부탁해 골치 아프게 한다는 것이 첫 반응이었지요. 지금 당장 장군계급을 회복해서 뭘 하겠느냐는 것이었지요. 전 장군은「노태우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고 윤 장군 민원을 떠 넘긴데 불쾌해했지요. 노사단장이 조금 기다려보라고 답변했으면 될 일을 왜 나한테까지 가져왔느냐는 것이었지요.. 이런 대목이 노씨의 책임지지 않으려는 특징을 잘 대변합니다. 윤 장군의 「참모총장 손영길 발언」이 앙금을 남겼는지도 모르지요.』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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