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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저자를 찾아|"한 4·19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전집 16권 완간 김현 문학|정과리<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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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가고 온다. 무엇이 가고 오느냐 하면 김 현이 가고 온다는 것이다. 김 현은 1990년 6월27일 새벽에 음침하게 매복해 있던 죽음과의 줄다리기에서 손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꼬박 3년 만인 엊그제 27일 김현 문학 전집 전16권이 완간 되었다. 전집의 완간과 더불어 김 현은 마침내 다시 왔다.
그가 3년 전 그날 이별을 고할 때처럼 새벽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김 현 전집 마지막 제16권이 막 익어서 따끈따끈한 김이 오르는 상태로 인쇄소로부터 김현전집 간행 위원회의 손으로 넘겨진 때는 환한 대낮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단잠을 깨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예정되었던 것처럼 저마다의 눈길로 그것의 범람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달고 한 시대가 육중한 몸을 뒤채며 몰려왔기 때문이다. 무슨 시대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의 동방 자이 건 추적자이건 그것을 4·19세대라 부른다. 다시 말하면 한국문화의 주체적 패러다임을 만든 세대란 말이다.
그 세대와 함께 한국 현대사는 처음으로 제 손으로 역사를 쓸수 있게 되었다. 일제 강점과 분단의 비극을 딛고 4·19혁명은 한국인이 그 스스로의 의지와 도구로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과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너무도 긴 수탈 끝이라 문화의 자원도, 문화인의 기력도 온전한 것은 제대로 없었다. 그러나 4·19세대는 그 몸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역시 그 몸으로 한국의 형상을 그려 나갔다. 그들의 역사 쓰기는 그러니까 비문을 새기듯 쓴 것도 아니고 습자하듯 베낀 것도 아니고 제 몸을 허물어 주형 판에 부어져 활자로 태어날 납이 그러하듯 한국의 정황 위에 부어져 양각된 문화로 다시 태어날 몸을 쓰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몸이 곧 그 정신이었다.
김 현 문학전집의 첫 번째 의의는 그 자신이『나는 언제나 4·19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고 말한바 있듯 4·19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여실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에 버금가는 한국문화 특유의 이념형을 찾으려는 초기의 야심만만한 기획이 압도적인 서구 문화의 밀려옴과 동양문화의 저 깊은 퇴락 사이에서 저것도 이것도 아닌, 그러면서 저것이면서 동시에 이것인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엎어지고 깨지면서 주파한 정신의 역사가 고스란히 그곳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역사가 어떻게 변주되어 갔는가. 그것은 4·19세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최일남의『숨통』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듯 변절과 낙망과 저항과 초월과 묵상과 분석의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있었다. 김 현의 궤적은 거기에서 4·19세대의 전체 사로부터 한 4·19세대의 개인사로 몸 바꾼다. 그러나 그 개인사는 전체사의 하위단위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전체사의 병행세계로서의 또 하나의 역사다. 그것은 전체사의 형성을 돕고 또 전체사의 움직임에 저항한다. 그럼으로써 전체사의 공간을 넓힌다. 다시 말해그것을 열린 체제로 만든다.
그 또 하나의 역사가 이룬 세상이 무엇이었던가를, 지금 모두 말할 수는 없다. 김 현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김 현 연구의 세계도 수없이 많은 병행세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그 병행세계들의 집합에 한 줄기로 가담한다면 나는 그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의 한국문학의 이념형을 만들겠다는 초기의 기획은 실체에 대한 집착을 서서히 버리고, 문화들의 관계를 탄력적인 수용과 반성과 재창조의 열린 관계로 만드는 공간이 문학의 자리이며 그 문학의 자리를 최대한도로 넓혀야 한다는 인식과 실천으로 재구성된다. 왜 최대한도로 넓혀야 하는가 하면 문학은 모든 것을 유용성의 척도로 재고 획일화시키는 이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반성과 발견의 모든 움직임들이「고통 하는 축제」로 뛰노는 가장 섬세하고 활기찬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와 공감과 반성의 문학은 80년 이후 끔찍한 욕망들의 뿌리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말년의 김 현에게 그것은 너무도 괴로운 광경이었다. 그는 그것을『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이라고 쓴다. 그는 절망한 걸까. 아니다. 그는 심연을「보았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눈은 꿰뚫기 위해 존재한다. 심연을 본 그는 심연에 구멍을 내서 안 보이는 역사 전망에까지 이를 긴 굴을 판다. 문학은 욕망들의 뿌리다. 아니다.
문학은 그토록 복잡하게 엉킨 뿌리들 사이에 묻은 흙이고 틈새다. 문학은 욕망들이 들끓는 세상을 비추고 그 의미를 묻는다. 거기서 그의 문학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을 담은 가 형성의 용기가 된다. 세상 전체를 담는 그릇, 한 시대의 우글거리는 욕망들이 몽땅 흘러들고 빠져나가는 둥근 반지, 그 모든 욕망들이 둥그렇게 둘레를 이룬 굴대를 굴리는 바퀴와 같은 것이 된다.
김 현 문학전집은 발견된 그의 모든 글을 모아 놓고 있다. 문학평론·논문·시평·단상· 수필·소설·일기·보고문 등 이 빠짐없이 망라되었다.
그러나 이 전집의 의미는 모든 글을 모아 놓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과 원칙에 의거해 편집하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김 현 전집의 자리는 김 현 그자신의 자리라기보다는 그와 타자가 대화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갖추어져야 했을 편집자의 주석은 미처 마련되지 못했다.
한글의 계속된 개작, 어느 한 글과 다른 글들 사이의 관계, 글이 쓰인 정황 및 그것이 일으킨 반향, 기타 주해 등이 주석을 통해 제시되어야 했으나 그것은 김 현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선결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이었고, 이번 문학전집은 갓 태어난 아기 전집에 불과했던 것이다. 훗날의 전집들은 다시 시작할 것이다. 전집이 대화의 자리라면 의당 전집 자신이 끊임없이 개편되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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