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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의 대가 위당 정인보-국학의 대가 위당-정인보 재조명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일제시대 국학진흥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탄생 1백주년을 맞아 학계에선 그 흔한 학술세미나 하나 없이 무관심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위당의 출생 일은 계사년(1893년)음력 5월 초엿새로 올해는 6월25일. 탄생 1백주년이란 뜻깊은 계기를 맞았으면서도 올해행사 역시 제자와 유족 몇몇이 모여 위당이 20년 넘게 봉직했던 연세대에서 25일 오전11시 조촐한 추모식을 갖기로 한 게 전부다.
위당은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과 함께 국사학·국문학·고증학, 그리고 근대시조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긴 대학자다.
위당은 명문이었던 동래 정문의 후손으로 지금의 명동성당 근처인 종현에서 태어나 한일합방을 전후해 경기 양근·충북 진천 등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세때 강화 학의 마지막 거유인 난곡 이건방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은 뒤 30세를 넘어서부터는 연희전문 등에서 국학을 지도했으며 신문 등에 글을 발표해 일제하의 민족혼을 되찾는데 주력했다.
위당 외에 구원이란 호도 갖고있는 그는 저술로 『오천년간 조선의 얼』『구원문녹』『조선 문학원류고』『조원시조집』『양명학연론』 등을 남겼다.
근대지성사의 큰 줄기를 이뤘던 위당 이지만 근래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연구업적은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
이는 학문적 성숙기인 58세때 납북된 탓도 있지만 국학의 거의 전 분야를 섭렵했던 그의 방대한 학문세계에 대한 섣부른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데도 이유가 있다.
위당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작업은 83년에 처음으로 이뤄져 당시 연세대 출판부가 연세대 1백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흩어진 위당 원고를 모아 「구원 정인보 전집」전 6권을 출간했다.
최근 3녀인 정량완 교수에 의해 『강화학파의 학문과 사상』 제1권이 출간됐는데 유족들은 강화 학 최후의 적자였던 선생의 유지를 이은 일로 기뻐하고 있다.
강화 학이란 18세기초 강화도에 우거한 하곡 정제두를 비조로 한 조선 양명학의 혈연적 사승 관계를 위당의 제자 민영규 교수가 붙인 이름이다.
강화 학은 계을 구체화하는 인과 예를 강조하면서 명분으로 치달은 주자학을 비판하고 마음의 양지가 곧 천리이며 양지를 계발, 사회적으로 실천하자는 중국 양명학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여기에다 의리에 구애받지 않는 자연스런 마음의 발현인 시문정신을 높이 사시문학을 수양의 하나로 삼는 특징이 있다.
강화 학에서의 위당의 공헌을 든다면 근대국학의 관점에서 『조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비로소 연구인줄 통각한데 있다』고 밝힌 점. 또 담헌 홍대용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양명학적 성격을 밝혀 그것을 실학과 양명학의 접점으로 제시한 것도 한 업적이다.
이번에 정교수가 심재호 교수(강원대)와 공저로 펴낸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은 하곡의 제자인 이광사 와는 재종간이면서 국내 양명학 연구에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던 월암 이광려와 함께 하곡의 손자사위 신대우를 다루고 있다.
정교수는 강화학파 20여명 학자들의 사상과 시문을 10여권 책으로 차례로 펴낸다는 연구기획이 시작된 이상 『부친에 대한 연구가 언젠가는 후학들의 손에 의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정교수는 국문학자의 입장에서 선친의 유고를 수집·정리해왔는데 담원 전집 제 7권으로 묶기에는 아직 모자란 분량이라고 아쉬워했다.
또 『구원문녹』의 한글번역도 절반 가량밖에 진척되지 않아 이번 탄신 1백주년에 펴낼 수 없었음을 안타까워했다. <윤철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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