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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2)<제89화>내가 치른 북한숙청(24)|전 내무성부상 강상호|남로당 파 제거(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중량급 월북 예술인들이 차례로 구금돼 조사 받는 동안 이들의 가족들은 평양시내 변방에 있는 일제시대의 기업 소 건물 등에 분산 수용돼 있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의 대기 상태였다.
예술인의 조사결과 총살, 정배, 가택연금, 예술활동금지 등 당의 지침이 떨어지면 가족들에 대해서도 후속조치가 따랐다.
가택연금과 예술활동금지 등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는 예술인들의 가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돼 총살 등을 받거나 산간오지의 탄광과 협동농장에 정배된 예술인들의 가족은 강제노동수용소를 비롯, 방직공장·고무공장 등의 직공으로 배치되어 24시간 감시를 받는「요 시찰 인물」로서 갖은 학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옥사하거나 정배지에서 소문 없이 행방불명된 사실도 모른 채 강제노동에 못 이겨 끝내 병사하기 일쑤였다.
왕족출신에다 미녀로 소문난 이원조의 부인 이정원과 딸 동숙(당시 21세·대학생)은 이원조가 53년 8월 공개재판에서 사형을 받은 후 자강도 강계시에 있는 고무공장과 급양 관리소에 각각 배치돼 직공과 점원으로 일했다. 그후 다른 지방으로 재배치됐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필자가 평양을 탈출한 59년까지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동북부지방에 있던 시인 임화의 부인 지하연(시인)은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53년 가을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중앙당과 내무성을 찾아가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당국은 총살집행을 앞둔「거물급 종파주의자」를 면회시켜 줄리 만무했다.
남편의 면회가 좌절되자 그녀는 정신이상자처럼 헛소리를 외치며 평양시내를 배회했다. 이를 본 많은 평양시 인민들은『저 여자가 임화의 부인』이라며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이같은 소문이 평양시내에 널리 퍼지자 그녀는 며칠 후 내무서원에 연행되어 평안북도의 한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가족들에 대한 탄압은 비단 월북예술인들뿐 아니라 남로당 파 간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간부들의 숙청과 가족들의 탄압과정에서 그나마 저항한 사람은 임화의 부인 한 사람뿐이었다.
남로당 파 간부들의 숙청은 대부분 중앙당이 그 간부가 소속하고 있는 부처의 긴밀한 협조를 받아 추진됐지만 월북예술인들의 숙청은 예외였다.
예술인들의 권익옹호단체인 문예 총은 당의 선전선 동부와 내각의 문화선전성의 지시와 지도를 받도록 돼 있다. 그러나 문예 총은 월북예술인들을 숙청하면서 당과 내각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추진했다.
당시 문화선전 성 부상이었던 정률 동무는 훗날 월북예술인들의 숙청과정에 얽힌 비화를 이렇게 일러주었다.
『작가동맹·작곡가동맹·미술가동맹·연극동맹·무용가동맹·사진 가 동맹·영화인동맹 등 7개 산하단체를 거느리고 있는 문예 총은 문화담당 제1부상의 직속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월북예술인들의 숙청이 시작된 사실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귀동냥하여 허정숙(허헌의 딸)문화선전 상에게 보고했더니 허 동지도 깜짝 놀라는 표정입디다. 며칠 후 중앙당에서 박창옥 선전선동부장을 만나「문화선전 성을 그렇게 물 먹일 수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박동지도「그 사업은 문예 총에서 수상동지와 직거래한 것」이라며 불만을 털어놓더군요. 하도 괘씸해 자세히 알아보니 문예 총 위원장 한설야가 부위원장인 안막(유명한 무용가 최승희 남편)과도 협의하지 않고 치밀한 계획서를 들고 김일성 수상을 찾아가 결심을 받은 사실이 불거지더군요. 한설야는 수상에게「박창옥과 기석복·정률 등은 남로당 파 예술가들과 자주 만나며, 특히 정률은 그들의 반동적인 작품활동을 내놓고 보장해 주고 있다」고 모략했다는 겁니다. 또「문화선전 상 허정숙도 그들에게 같은 서울 파 입장에서 애정을 갖고 있다」고 보고했다는 거예요. 한설야의 보고를 듣고 있던 수상은 익히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한 동무가 잘 파악했소. 나는 한 동무의 투철한 혁명정신을 높이 평가하오. 반동예술가들의 문제는 한 동무에게 일임할 테니 책임지고 그들과 투쟁하시오. 내무상 방학세 동무에게도 지시해 둘 테니 어려움이 있으면 방 동무의 협력을 받으시오」라고 지시하더랍니다.』
이같은 배경에서 시작된 월북예술인들에 대한 숙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자 내무성 예심 처는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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