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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총장, 「12·12」성공후 군실세 부상<25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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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83년1월 차규헌 2군사령관이 예편하면서 육사8기는 군문에서 사라졌고 9기는 82년6월 윤성민 대장이 국방장관이 될 무렵 이미 군을 떠났다.
전두환과 황영시의 관계는 우리 군부의 인맥형성과 그 내막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전 소장이 78년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끝내고 황 중장의 1군단예하 1사단장에 부임하면서 가까워졌다. 황군단장은 유학성·차규헌 중장과 달리 11기들의 후원자인 윤필용 장군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그는 줄곧 야전 쪽에 있었다. 12·12당시 경복궁 그룹 선배 3명중 한명인 그는 거사에 실병력을 동원한사람이었다.

<휘하병력 동원책임>
서울에 들어온 노태우 9사단장의 29연대, 이상규 2기갑여단장의 1개 전차대대, 30사단 송응섭 대령의 90연대 등은 모두 황 중장의 l군단 휘하였다.
12·12에 참여한 한 인사의 증언. 『전 사령관은 소탈하지만 무슨 일을 할 때는 보안의식에 철저한 사람입니다. 12·12 참석자들은 전 사령관의 「차나 한잔 마시자」는 연락을 받고 간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유학성 군수차관보·차규헌 수도군단장도 마찬가지로 모임의 의도를 확실히 몰랐지요. 이에 비해 황군단장만은 전 사령관과 구체적인 교감이 있었지요.
전 사령관과 황군단장간의 공감대를 든든하게 한 것은 정승화 총장의 군 인사관리에 대한 불만이었다. 26년생으로 10기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황 중장은 정 총장이 10·26후 장태완 소장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육군종합학교 출신이나 다른 비정규 출신을 중용하는데 대해 불만과 불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75년 3사관학교장당시 소장으로 계급정년에 해당돼 예편할지 모른다고 의기소침해한 적도 있었다. 그는 나이로 봐 육군총장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정승화 총장과 가까웠지만 김계원 비서실장 라인으로 알려져 김재규 쪽으로부터 견제 받았다. 더욱이 동기생 중 선두를 다퉈왔던 신현수 중장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안동농림 후배였다.
여기에서 12·12의 원인 중 하나였던 군 인사 정체의 원인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당시 육사 10기와 11기, 그리고 종합학교 출신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10기가 소위로 임관할 무렵 6·25가 터져 정부는 초급장교의 보충이 급해지자 4년제 육사를 폐교하고 육군종합학교를 설립했다. 여기에 시흥의 갑종간부학교를 합쳐 50년10월부터 10개월간 32기생까지 7천여명의 육군소위를 배출, 전선에 투입한다. 그후 육사는 진해에서 다시 개교해 4년제 11기를 배출할 때까지 10기와 5년간의 격차가 있고 그것을 메운 것이 종합학교출신 장교다. 11기생들은 단기교육을 받은 종합출신들이 안중에 없었고, 종합출신들은 단결력은 없지만 11기생들이 6·25전투경험이 없음을 비판했다. 종합출신의 간판급 장성은 71년 종합 최초의 장군진급자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종합11). 박종규 경호실장, 경호실차장보를 전 장군에게 넘겨준 이광노 장군 등이 종합출신이다.
정 총장이 장태완 교육참모차장을 수경사령관에 임명했을 때 전 사령관은 『종합출신을 내세워 11기들을 견제, 맞상대시키려 한다』는 불만 섞인 반응을 보였다.

<총장기도 뜯어고쳐>
거기에다 전 사령관을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은 장태완 소장의 단짝인 종합12기 출신 이필조 논산훈련소장을 자신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에 임명할 것이라는 나름의 정보판단 때문이다. 전 사령관이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출될 것이라는 문제의 소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대립 탓으로 종합출신들은 상당수 12·12후 단계적으로 밀려났다.
황 총장은 12·12거사에 성공한 뒤 육참차장으로 군내 강경 분위기를 주도했고 81년12월 이희성 총장후임으로 24대 총장에 취임한다. 전대통령도 처음 총장으로서의 그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83년 들어 그의 스타일과 군 관리에 대해 점차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황 대장은 무언가 새로 뜯어고치기 좋아하고 개성이 강해 군내의 평가가 엇갈렸다.
그는 군내 군살을 도려내겠다며 82년 2군사령부 예하의 3관구·5관구 사령부를 없애기도 했다. 그는 총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별과 태극이 그려진 참모총장 표지기를 새로 만들어 자신이 있는 곳에 항상 게양토록 했다. 그가 밀어준 동기생 김윤호 합참의장은 콤비를 맞추듯 윤성민 국방장관을 몰아세우곤 했다.
83년 들어 그가 한남동 총장공관을 보수한데 대해 전대통령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또 육본 벙커에 새로 만든 상황실을 둘러본 전대통령은 「외국사람에게나 보여주면 좋겠다」고 시큰둥해했다. 황 총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상황실은 브리핑하는 장교가 아래층에 있고 위는 유리로 가리는 동 공군작전사령부의 느낌을 주었다.

<합참의장 신고요구>
『황 총장은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나름대로 군 작전에 대해 권위를 갖고 있었고 후배들도 상당부분 인정했지요. 그러나 권위의식이 지나쳐 독단적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였어요.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이기백 대장이 권한은 없지만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임명됐을 때 육군에서 전출신고를 하라고 고집해 신고를 받을 정도였지요. 그는 또 무엇이든지 지기 싫었어요. 좋아하는 테니스도 꼭 이겨야 표정이 밝았지요. 그래서 참모들은 황 총장의 테니스 파트너가 될 때는 신경을 썼습니다. 황 장군의 강연식 이야기를 잘 들어준 사람이 노태우 소장이었어요. 전대통령은 그의 권위의식과 강한 개성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겼고 부담을 느꼈지요.』 육본참도 출신 A씨의 기억이다.
이것저것을 고려한 전대통령은 황 총장의 경질을 결심했다. 그리고 같은 10기인 소준열 1군사령관도 예편시킴으로써 11기 시대를 개막시켰다. 그렇지만 전대통령은 4개월 뒤 황총장을 감사원장에 임명했다. 전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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