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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 '兩强' 강우석·강제규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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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서 되는 건 영화뿐인 것 같다. 다들 '죽겠다'며 한숨짓는데 극장만 미어진다. '쉬리''엽기적인 그녀''공동경비구역 JSA''친구''가문의 영광' '살인의 추억'등 최근 몇년새 5백만명을 넘긴 작품이 얼추 꼽아도 열손가락을 넘는다.

말이 5백만명이지 극장을 찾는 연령대의 4명 중 한명이 봤다는 얘기다. 이 뜨거운 열기가 어느 날 갑자기 식어버리지나 않을까 불안해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꺼져버릴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실미도'(강우석 감독)의 흥행 '대박'이 그런 심증을 굳혀 준다.

개봉한 지 2주일 만에 전국에서 4백여만명이 봤으니 '친구'의 역대 최고 기록(8백20만명)을 깨는 건 물론이고 '꿈의 숫자'인 1천만명을 충분히 내다볼 만한 상황이다.

충무로가 '실미도'의 흥행에 들떠 있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다음달 6일 개봉하는 '태극기 휘날리며'(이하 '태극기')가 바통을 이어받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강제규 감독이 '쉬리'이후 5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사실 최근 한국영화 중흥의 분수령은 '쉬리'였다. '쉬리 이전'과 '쉬리 이후'로 나뉠 만큼 '쉬리'는 한국영화의 지세를 바꾸어 놓았다.

바로 그 주인공이, 더구나 통상 제작비의 4,5배가 넘는 1백40억원을 들여 찍는 영화라니 어찌 기대가 높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동건.원빈 주연의 '태극기'는 한국전쟁이 배경인 전쟁영화. 묘하게도 '실미도'도 1백억원을 들인 대작인 데다, 남북 분단의 산물인 북파 부대원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이래저래 두 감독은 지금 화제의 중심일 뿐 아니라 한국영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지난 9일 오전 두 사람을 만났다. 초년 시절 같은 감독 밑에서 선후배로 연출 수업을 받은 적도 있어 둘은 '형, 아우'하며 아주 막역했다.

"어제 전화에 대고 '태극기'가 '실미도'보다 딱 한 명만 덜 들면 좋겠다고 덕담을 했더니 제규가 그러더군요. 형, 그래도 내 영화가 돈이 더 들었으니 '실미도'는 1천40만명, '태극기'는 1천50만명을 해야지 라면서 웃더군요."

"형, 솔직히 '실미도'가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어. 다들 데이트나 즐기는 연말에 이런 심각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누가 볼까 했거든. 많아야 2백만~3백만명이라고 봤는데…."

"나도 그래.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돈이 아니라 빚을 내서라도 내 개인돈으로 찍을 걸 그랬어. 하하하."

"애초 예상과 달리 여성 관객이 크게 몰리면서 불이 붙은 것 같아."

"사실 처음 영화에 들어갈 땐 여성층은 포기했어. 그러다 촬영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지. 주인공이 어머니 사진을 찢는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현장에 있던 여성 스태프들이 눈가를 훔치고 있는 거야. 왜 우냐고 했더니 너무 슬프다는 거야.그 때부터 여성 관객에게도 먹히겠다는 믿음이 생겼어."

"충무로에서는 남성 관객.여성 관객을 너무 기계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어. 소프트한 멜로가 있어야 여성 관객을 흡수할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들 하지. 하지만 '친구'나 '공동경비구역 JSA' '살인의 추억'을 보라고. 감상 포인트만 제대로 짚어주면 멜로가 없어도 누구나 감동을 느껴. 거기엔 남녀 구분이 없는 거야."

"'실미도' 성공을 보며 생각난 게 있어. 그 동안 우리 영화가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거야. 광주항쟁을 다룬 '꽃잎'이나 삼청교육대가 소재인 '나비'가 있긴 있었지. 하지만 이들은 사건을 정면에서 다루기보다는 곁가지에 매달려 우회한 느낌이 들어. '실미도'는 좀 달랐지. 사건 그 자체에 정공법적으로 파고든 거지. 한국 관객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그런 걸 속시원히 풀어줄 영화를 기다렸던 거야. 일부에선 '실미도'가 영화적으로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며 흠을 잡는데, 맞아. 하지만 난 처음부터 촌스럽게 갈 작정이었어. 왜냐? 가슴쓰린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데 미학이나 세련미가 왜 필요해. 진실한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그건 그렇고 너는 신작이 나오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 '쉬리'이후 네 작품을 기다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중간에 SF영화를 한 편 구상하고 있었는데 한 2년 진행하다가 접어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졌어. 또 다른 이유는 '쉬리' 이후에 돈이 좀 생기자 극장사업도 하고 내가 직접 제작도 해 보겠다고 하면서 일을 너무 벌인 탓도 있지. 좋은 경험이 됐어. 난 영화감독 이외에 다른 일을 하면 절대 안 되는구나, 확신했지. '태극기'끝나면 작은 오피스텔 얻어서 프로덕션 회사 차릴거야. 오직 감독 일에만 전념하려구 말이야. 진짜야."

"정말 생각 잘 했다. 요즘 후배 감독들 중에도 영화 한 편 터졌다고 딴 생각하는 경우를 간혹 보는데 위험한 발상이야. 감독해서 흥행 좀 시키면 '아 저 돈이 다 내 건데 왜 나는 연출료밖에 못받지?' 그러면서 유혹이 생기거든. 그 유혹에 넘거가면 감독 수명은 끝장이지."

"이번 '태극기'는 아주 힘들게 찍었어. 총 1백36일을 촬영했으니까. 보통 영화의 3,4배가 넘잖아. 게다가 세트에서 찍는 건 거의 없고 한국전쟁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 곳곳을 다니며 로드 무비처럼 찍었으니 배우랑 스태프들 모두 고생 많이 했지. 총격전 같은 위태로운 장면이 많아 사고나지 않을까하는 신경까지 써야 했으니…."

"그래 고생 많았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앞서 간다는 건 힘겨운 일이지. 한국영화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전쟁영화를 네가 처음으로 감행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난 성격상 같은 걸 반복하는 건 질색이야. 힘에 부쳐도 매번 새로운 걸 하고 싶지. 만약 이번에 성공해 할리우드에서 전쟁영화 한 편 더하자고 해도 '노(NO)'할 거야.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해야지."

"제규야 '실미도'가 뜨니까 요즘 초조하지? 걱정마. 며칠 전 '실미도'보고 나오던 여성 관객 몇명이 '태극기' 포스터를 가리키며 다음에 저거 꼭 보자고 하더라. 얼마 전에 나 CNN에 나왔잖아.'반지의 제왕'을 제친 자국 영화 감독이라고 말이야. 이 분위기를 '태극기'가 이어 가야지."

"고마워, 형. 잘 할게."

이후남 기자<hoonam@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 강제규(42)

▶ 중앙대 연극영화과
▶ 감독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95년)
▶ 주요 작품:'쉬리'(99년, 전국 관객 6백여만명)
▶ 영화사: 99년 강제규 필름 설립

*** 강우석(44)

▶ 성균관대 영문학과
▶ 감독 데뷔작:'달콤한 신부들'(88년)
▶ 주요 작품:'투캅스'(93년) '마누라 죽이기'(94년)'공공의 적'(2002년)
▶ 영화사:93년 시네마서비스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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