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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 인물 누가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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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은행이 2009년에 나오는 5만원.10만원권의 초상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했다. 김구.김정희.신사임당.안창호.유관순.장보고.장영실.정약용.주시경.한용운(이상 가나다순) 등이다.

한은은 21일까지 홈페이지(www.bok.or.kr)를 통해 이들 후보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고, 화폐 도안 자문위원회(의장 이승일 한은 부총재)가 9월 말이나 10월 초에 두 명의 초상 인물을 최종 확정하기로 했다.

한은은 그동안 화폐 도안 자문위원회가 추천한 1차 후보 20명을 대상으로 국민 여론조사(만 19세 이상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와 학계.사회단체의 전문가(150명) 의견 조사를 거쳐 10명의 후보를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후보군 10명이 발표되자 거센 논란이 뒤따르고 있다. 우선 선정 방식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여론조사로는 결국 인기투표로 흐를 수밖에 없다고 경계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벌써 한은 홈페이지의 여론 수렴 코너에는 특정 인물을 선택하라는 시위성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다른 한 갈래는 압축된 후보들의 타당성 여부다. 고려대 경제학과 신관호 교수는 "화폐의 초상 인물은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와도 일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기 투표로 흐르는 인물 선정=한은이 후보 10명을 압축하는 데는 여론조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차 후보 20명에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10명 후보에 포함된 유관순이 대표적인 사례다. 왕용기 한은 발권국장은 "유관순은 설문조사와 전문가 서면조사에서 폭넓은 기명 추천을 받아 최종 후보군에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 사학과 임성모 교수는 "초상 인물 선정은 국회 차원이나 정부.한은이 주도하되 여론조사는 보조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여론조사로 진행되면 자칫 국가 정체성이나 역사성과 동떨어진 인물이 선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의 입안자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항상 가장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로 꼽히지만 한 번도 지폐의 초상 인물이 된 적은 없다. 임 교수는 "사카모토 료마가 상징하는 의미가 현재 일본의 정체성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의 부국강병과 군국주의가 현재 일본이 내세우는 평화주의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거꾸로 미국의 18대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인물로 꼽히지만 50달러 지폐의 초상 인물이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사실상 종식시킨 역사적 업적을 평가받은 것이다.

◆후보군 타당성 논란=후보 압축에는 한은의 눈치보기도 작용했다. 우선 '이(李)씨' 성을 가진 인물은 처음부터 배제됐다. 한은 측은 "퇴계 이황(100원).율곡 이이(5000원).세종대왕(1만원) 등 이씨 성을 가진 인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은 관계자는 "다른 종친회들의 반발을 의식해 성씨를 안배할 수밖에 없다"며 "후보군 가운데 여성이 2명인 것도 여성계를 배려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장영실은 '이공계 기(氣)살리기' 차원에서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될 만한 인사는 아예 후보군에서 배제됐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건국의 상징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초상 인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지만 찬반 격론이 벌어질 게 예상돼 아예 20명 추천 후보에조차 넣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20명 후보에 들었다가 탈락된 인물에는 신채호.윤동주.김소월.방정환 등이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 이승일 부총재는 "고액권 초상 인물은 번영의 상징이자 후세대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는데 쉽게 확신이 안 선다"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원은 발상의 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영국은 생존 인물인 엘리자베스 여왕,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 중국은 마오쩌둥을 색채나 모양만 약간씩 바꿔 모든 지폐에 넣고 있다"며 "우리도 100원짜리 동전에 누군지 분간도 안 되게 새겨진 이순신이나 역사적으로 검증된 세종대왕을 변형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준현.김창규 기자

외국에선

세계 주요 46개국의 화폐 전면 도안에는 인물 초상이 83.2%를 차지한다. 정치인(66.9%)과 문화예술인(30.7%)이 대부분이고 일반인은 2.4%에 불과하다. 화폐의 대부분에 인물 초상이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 상징성이 큰 데다 위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은이 고액권에 인물 초상을 채택한 배경이기도 하다. 화폐 앞면에 상징적인 건축물을 넣은 대표적인 경우는 유럽 12개국이 함께 쓰는 유로화다. 주요국 화폐 뒷면에는 건축물(23.5%), 문화유적(16.3%), 동식물(15.3%), 자연경관(7.2%), 예술품(6.1%) 등으로 다양하게 장식돼 있다.

미국 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조지 워싱턴(초대), 토머스 제퍼슨(3대), 앤드루 잭슨(7대), 에이브러햄 링컨(16대), 율리시스 그랜트(18대) 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 벤저민 프랭클린(독립선언서 기초) 등 정치인 초상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국장, 독립선언, 링컨기념관, 재무부, 백악관, 의사당, 독립기념관 등이 들어 있다.

일본 엔화 지폐 앞면에는 노구치 히데요(의학자), 히구치 이치요(소설가), 후쿠자와 유키치(계몽 사상가) 등이 등장한다. 뒷면에는 후지산, 붓꽃, 봉황 등을 쓰고 있다.

아직 유로화를 쓰지 않고 파운드화를 고집하는 영국은 1960년대부터 모든 파운드화 지폐 앞면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사랑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뒷면에는 엘리자베스 프라이(사회개혁가), 찰스 다윈(생물학자), 애덤 스미스(국부론 저자), 존 후볼론(잉글랜드은행 총재) 등 각각 다른 인물이 들어가 있다.

중국 위안화 앞면에는 한때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등이 다양하게 등장했으나 지금은 모두 마오 초상으로 통일돼 있다. 화폐 단위에 따라 색깔과 마오의 모습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뒷면에는 태산, 장강삼협, 계림산수, 포탈랍궁,인민대회당 등을 담고 있다.

인도는 5루피 지폐부터 최고액권인 1000루피까지 모두 마하트마 간디를 인물 초상으로 쓰고 있다. 인도의 루피는 비폭력 평화를 상징하면서 전 세계에 인도를 알리는 데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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