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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½장으로 쓴 세계역사』 줄리안 반즈 지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영국 소설계의 40대 기수중 한사람인 줄리안 반즈가 쓴 이 작품은 제목이 말해주듯 10개 장과 1개의 삽입장, 그리고 주해로 이루어져있다. 각 장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각각 다른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예컨대 제 1장에서는 노아의 방주에 몰래 숨어든 나무 좀 벌레가 하자가 되어 노아의 이기적 탐욕·편견·무지를 폭로하며 제5장은 프랑스 화가 제리코가 1819년 그린『메두사호의 뗏목』을 소재로 1백여 명이 사망한 처참한 난파사고가 어떻게 예술로 전화됐는지(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건메두사호 난파사고가 아니라 제리코의 그림뿐이다), 역사가 어떻게 허구화·신화화되는지를 따지고 있다.
노아의 방주로부터 우주비행선까지 등장하는, 연관성이 없는 듯한 이야기들이 실은 노아의 항해와 나무좀벌레라는 기묘한 축을 중심으로 얽혀 인간과 세계·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무좀벌레의 증언이나 노이로제환자의 꿈 또는 문명에 찌들지 않은 인디언이 보는 세계를 제시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꾸며진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 우리가 보는 세계가「진정한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다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비전통적 형식과 다의적 내용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지만 탈 구조·해체를 지향하고 있지는 않아 재미있게 읽힌다. 여러 이야기들에서 반복되는 이미지와 모티브를 통해 사랑·진리·신화와 현실, 자유의지를 생각하게 하고 인간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성서에 대한 패러디·종교재판 기록·편지글·실제 그림에 대한 예술사적 에세이 등 다양한 형식을 거침없이 구사하여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가의 솜씨는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의 대가라는 평판을 실감케 한다. 반즈의 작품 중 국내 처음 소개되는 것으로 역자의 섬세한 번역과 주석이 돋보인다.

<도서출판 동연·4백쪽·6천5백원><곽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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