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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즉흥성·정치성 탈피가 열쇠(개혁 이렇게 하자: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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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윗물정화·국민참여 맞물려야 성공/「신악」못나오게 경계하는게 더 중요/타락한 구정치세력 물갈이 없인 불가능/신한국 청사진 내놓고 제도고쳐 개혁을
문민정부 출범이후 시작된 비리척결 사정작업이 큰 충격파를 던진 가운데 일단 마무리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사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 개혁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법과 제도의 정비를 서둘러야 할때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바탕으로 신한국건설을 위한 실질적인 설계를 보다 구체화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 같다. 각계 전문가들의 특별기고를 통해 본격 추진해야 할 개혁과제와 그 추진방향을 7회에 걸쳐 짚어본다.<편집자 주>
오늘의 한국사회는 마치 혁명직후의 여느 사회를 방불케 하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이 자기재산을 공개하고 정치자금까지 거절하면서 부패척결 의지를 실천에 옮기자 한국사회가 지각변동을 일으키듯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사정의 칼을 휘두르자 그동안 권력과 부의 그늘에 가려있던 각종 비리들이 백일하에 밝혀지고 그 여파로 내로라하던 고관현직들이 이슬처럼 사리지고 있다.
○검찰마저 비틀
전·현직 국회의장을 포함한 국회의원 10여명이 의원직 사퇴·구속·탈당·출당 등 조치를 받았고 14명의 장·차관급 인사가 정부에서 쫓겨났다. 얼마전까지도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던 군부가 된서리를 맞았고 한때 김 대통령과 힘겨루기를 했던 철의 황제와 6공의 황태자가 몰락했는가 하면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사정의 성역으로 취급되었던 검찰마저 개혁의 돌풍에 휘말려 비틀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할 점은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범법자를 처벌하는 지극히 상례적인 행형행위일 뿐이지 그것이 곧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정부가 반시대적인 범법자의 단죄를 개혁으로 착각하고 개혁작업의 초점을 사정에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은 한차례의 야단스런 소탕작전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정부가 취하고 있는 사정조치는 마땅히 그동안 한국사회를 병들게 했던 부패문화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행과 제도를 창출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김영삼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작업 역시 건국이래 수없이 되풀이 돼온 비리와 사정의 악순환을 또 한번 반복하는데 그치고 말 것이다.
○정계개편 필요
사실 사정조치는 개혁의 필요조건은 될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될수 없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사정이후의 제도화작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사정작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개혁의 제도화에 성공하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우선 사정활동 계획을 단계별로 나눠 구체화시키고 궁극적인 목표를 과거 청산보다 신한국의 미래상에 조응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정이 즉흥성과 정치성을 탈피하고 개혁지향성을 일관성있게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감안해서 정부는 하루빨리 신한국의 미래상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하고 모든 개혁정책을 이것과 접맥시켜야 할 것이다.
두번째는 정개계편을 통해 새로운 지도세력을 형성하는 일이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이지경이 된 주요 원인은 지도세력의 타락과 부패에 있는 것이며 그들은 대부분이 개혁과 청산의 대상일 뿐이지 결코 주체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지도세력을 새로 형성하지 않는한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은 일정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의 정치지도세력은 태생적으로 5·16과 12·12의 유전자를 이어받았고 부동산투기를 자행하고도 투기가 왜 나쁜지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부도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개혁운동에 앞장설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적인 역설이요 도로일뿐이다.
○국민을 주체로
또하나 뒤따라야할 조치로는 일반국민들의 참여폭을 넓히는 일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에 박수갈채를 보내면서도 참여자의 입장을 유보하고 관객의 위치에 머물러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방관자적 관객을 하라빨리 주체적 참여자로 바꿔 위로부터의 개혁과 밑으로부터의 참여가 맞물리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래야 개혁의 역동성이 증폭되고 개혁이념이 국민들의 생활이념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참여를 촉진시키려면 정부는 먼저 국민을 보는 시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과거의 역대정부는 국민을 개혁의 대상자로 보았지 주체로 보지는 않았으며 바로 이점이 문제였다. 걸핏하면 정부는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면서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정녕코 개혁되어야 할 의식은 가진자와 힘있는자의 의식이지 일반국민의 의식은 아닌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재산공개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사실이 밝혀진 전·현직 각료와 정치인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국민들의 의식도 바뀔수 있고 개혁작업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전두환정권이 사회정화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의식개혁을 강조했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어처구나 없는 아이러니였으며 당시의 지도세력이었던 5공인사의 의식이 먼저 개혁되었더라면 한국병은 일찌감치 퇴치되었을 것이다.
○용두사미 걱정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조건은 신악의 출현을 경계하는 일이다. 김 대통령도 강조했듯이 개혁작업은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떤 정권이든 집권초기에는 청교도적인 사명감마저 느낄 정도로 개혁작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하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물러서는 것이 통례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정권이 잉태시킨 이른바 신악이 개혁의 명분과 당위성을 거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구악을 단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악의 태동을 경계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김호진교수 고려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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