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검찰(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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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마침내 정덕진씨의 검찰내부 비호세력이란 의혹을 사왔던 고검장급 검찰 고위간부들에 대한 자체 수사가 시작되었다. 아직은 수사 또는 내사단계이나 앞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에 대해서는 사법처리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검찰 사상 초유의 불상사다. 5·16이후 지금까지 검찰 고위직은 물론 평검사조차도 사법처리가 된 전례가 없었다.
이제 검찰이 해야 할 일은 엄정한 사실 규명이다. 검찰로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으나 자체 인사라 해서 감싸고 돌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어느 사건보다도 철저한 수사를 벌여 국민이 납득할만한 결과를 얻어내고 그에 따른 조처를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에선 검찰의 자체 수사로 과연 엄정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의심은 이번 수사대상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린건 이미 오래됐지만 그동안 검찰의 태도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려는 인상을 풍겼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내부인사라 하여 엄정한 수사를 못할만큼 자정능력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적인 정을 떠나 검찰 전체의 명예를 걸고 흑백을 가려주길 바란다. 우리는 이번 검찰의 자체 수사가 김영삼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안타깝게 생가한다. 검찰이 사정기관의 중추이면서도 자체 문제에 대해서는 위로부터의 지시가 있고서야 겨우 손을 대기 시작하는 정도라면 검찰의 사정작업 전체가 불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검찰의 사정작업은 지나치게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는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어왔다. 슬롯머신사건외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만해도 이원조의원의 출국은 방치하면서 김종인의원에 대해서는 소환을 서두르다 형평성문제가 제기되자 소환을 연기하고 검찰자체의 수사와 더불어 다시 소환을 계획하는 등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여왔다.
새 정부가 들어서도 검찰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구태를 재연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번 슬롯머신 사건이 그 자체로 검찰의 명예와 위신에 치명상이 된 것은 사실이나 앞으로 수사에 따라서는 검찰이 새로 태어나는 전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비단 검찰 자체에 대한 수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론되고 있는 정치권의 관련인사,기타 안기부·경찰 등의 관련인물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사를 벌여 소문의 진위를 분명히 가려주기를 바란다. 현재의 소문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애꿎은 인사나 분야의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다. 소문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도 그 수사결과를 낱낱이 공개해야 국민의 의혹이 풀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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