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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포도 "1등 출하" 논산 성효용씨|"제철 4개월전「황금포도」맛보세요"|세계 최고 연 두 번 수확 도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기원전 2천년부터 재배가 시작된 다년생의 낙엽성 덩굴식물로 5∼6월에 꽃이 달린다. 과실은 8∼10월에 열리며 생식·건과·포도주용으로 주로 쓰인다」.
포도나무에 대한 사전적 설명이다.
포도에 대한 이런 정의가 상당부분 의미를 잃는 수도 있다. 성효용씨(농업·37·충남 논산군 연무읍 마전리)를 만날 때다.
최근 10여년 동안「성씨의 포도」는 1∼2월 꽃을 피웠고, 4∼6월 열매를 맺었다. 포도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계절을 살아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황당함 때문에 성씨의 포도알은 가위 황금알이다. 요즘 시세로 ㎏당 2만원, 제철인 8∼9월의 10배 이상 되는 가격이다.
성씨는 애초 전원이니 목가적이니 하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포도농사에 뛰어든게 아니었다. 돈을 벌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포도농사를 시작했고 지금 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그는 자신이 순박한 농사꾼이 아니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한다. 아니「농사 프로」를 자처한다.
「농장」보다는 「공장」적 성격이 강한 성씨의 포도원은 1천8백여평. 큼지막한 비닐하우스 네개동이 경사가 거의 없는 이 구릉에 빼곡히 들어서 있다. 농촌을 지나치다보면 차창으로 흔히 보이는 비닐하우스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 외양이다. 별스러 보이지 않는 이 포도농장에 지난 한해만 3만여 명이 견학을 다녀갔다. 이른바 그의「포도 신농법 강의」를 듣고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농민 청강생들이다.
포도 신농법의 핵심은「초기」출하. 성씨는 지난 77년6월15일 그해 처음으로 포도를 시장에 선보인 후 지난 4월10일 서울 가락시장에 올 첫 출하를 기록하기까지 매년 1등 출하를 놓친 적이 없다.
초기출하의 비결은 첨단 하우스 재배. 이 비닐하우스 내부에 설치된 이산화탄소 발생기·자동온도조절장치 등이 문외한이 봐도 보통 포도농사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비닐하우스 내 이산화탄소발생기는 포도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 설치한 것. 이 기계는 식물광합성의 원료인 탄산가스를 적절히 배출해 포도의 당생산을 돕는다. 자동온도조절장치로는 개화시기를 조절한다.
대충 이같은 내용의 포도 신농법이 골격을 형성한 것은 지난76년. 야간중학졸업 학력의 성씨는 이해 외가가 있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 정착하면서 포도농사에 입문했다. 당시는 오이·수박 등 몇몇 열매 채소류에 대한 하우스 재배가 전국적으로 농가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다.
성씨는 이듬해『포도라고 안될리 없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도한 하우스재배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남의 밭 8백여평을 빌려 3년여 지은 포도농사로 당시 웬만한 아파트 서너채 값에 해당하는 2천여만원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씨는 돈을 더 벌 욕심으로 포도농사에 병행해 슈퍼마킷을 개설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 다시 원점에서 포도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84년 한해 포도농사의 적지인 황토를 찾아 전국을 헤맨 끝에 정착한 곳이 현재의 논산. 농협 융자와 사채를 얻어 4천여평의 땅을 장만하고 그 일부에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성씨의 재배 주종목은 델라웨어. 지름 1㎝ 남짓의 자주빛 씨없는 포도다. 85년 묘목을 심은 후 첫 수확이 시작된 87년 그는 2천여만원의 순소득을 올렸다. 틈틈이 쌓은 일어 실력으로 주경야독해 일본의 포도농서를 섭렵한 그는 거름의 양·전정·수분조절·지온관리가 포도 조기 다수확의 절대 조건임을 깨닫게 됐다.
해를 거듭하며 익힌 노하우에 비례해 수확량도 늘고 수입도 늘었다. 또 성씨 자신이 놀랄 만큼 말솜씨도 크게 늘었다. 농협 등을 통해 성씨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찾아온 예의 포도 신농법 청강생들과 잦은 대화가 그를 명강사로 만든 것이다.
한편 신농법 청강생들과의 대화는 그가 농업의 본질에 눈을 뜨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자신만의 농사에서「우리들의 농업」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92년 농협의 새농민상 수상, 올 3월「농민신문사」주최의 영농수기 공모에서『나의 인생 포도와 함께』로 탄 대상 등은 그에게「앞서가는 농민」의 또 다른 책무를 일깨워줬다. 성씨가 지난해부터 인근의 30대 농민들을 모아「농촌부흥작목회」를 조직한 것이나 그외 각종 농민단체의 회장·총무 등을 맡고 나선 것은 다 이런 맥락에서다.
성씨의 책무란 농산물시장 개방에 앞장서 대처하는 것이다. 그는「정면승부」를 택했다. 과학영농, 즉 기술로 시장개방의 위기를 넘기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성씨의 포도 신농법은 당장 겨뤄도 일본이나 구미 농가의 재배법에 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연간 2회 수확이라는 획기적 포도재배법을 세계 최초로 실현할 목표로 지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성씨는『성공할 자신이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미 간단한 실험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대량수확을 위한 대량재배법도 거의 윤곽이 잡혔다. 소비자들은 빠르면 95년께 성씨가 1년 2회 수확한 포도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영농의 미래가 낙관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성씨는 최근 자신이 좀 잘 나가는 듯 싶자 여기저기서 신청하지도 않은 영농자금이 지원되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어려울 때는 단 몇푼 융자받기도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말이다. 그는『당국이 조금만 농촌에 더 애정을 가져주면 농민들한테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당장 영농자금 배정을 늘리지 않더라도 지원창구나마 일원화시켜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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