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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백인들 이민 "러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들이 최근 국내 정정 불안이 가속화하면서 해외 이민 러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백인들의 조국 탈출 현상은 지난 3월 발생한 흑인 지도자 크리스 하니 암살 사건을 계기로 분노한 흑인들의 시위 과정에서 빚어진 무정부 상태와 현재 진행중인 다민족 정치 협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흑인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가시화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인종 분리) 정책에 반발하는 흑인들의 저항이 있었던 61년의 샤퍼빌 대학살 사건과 76년 흑인들의 소웨토 대봉기 때도 백인들의 이민 러시가 일시적으로 집중됐었다.
그러나 최근의 남아공 백인들의 위기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 과거의 일과성 이민 러시 현상과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국제 이사 화물 전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톰 앤슬리씨 (50)는 요즘 부쩍 늘어난 고객들의 문의 전화를 받고 있다.
하니 암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 평소 상담 전화보다 두배가 늘어난 하루 평균 1백여통의 전화 문의를 받고 있다고 앤슬리씨는 말했다.
4대째 남아공에서 살고 있는 앤슬리씨는 『보통 고객의 전화를 받고 출장을 나가 이사 규모에 따라 견적을 낸 뒤 계약하는 것이 순서인데 요즘은 손님들이 전화로 비용 문제를 협의하고 가능한한 빠른 시일 안에 이사 날짜를 잡아줄 것을 부탁한다』며 『심지어 공포에 질린 목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다』고 최근의 백인 이민 러시 현상의 양상을 설명한다.
남아공은 지금까지 특별히 소란스러웠던 몇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입국 이민자수가 출국이민자 수를 두배 이상 초과하는 국가였다. 남아공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92년 한햇동안 출국 이민자 수는 4천2백89명, 입국 이민자수는 8천6백88명이었다.
이같은 추세는 올 3월 발생한 하니 암살 사건으로 역전 추세를 보일 전망이다.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 회의 (ANC) 의장은 최근 불붙고 있는 백인들의 이민 러시와 관련해 남아공에서 흑인 정권이 출현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백인들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며 백인들을 안심시키려는 유화제스처를 보였다.
데 클레르크 정권이 협상을 통해 흑인들에게 정권을 인계할 생각까지 하게된 이면에는 흑인정권이 백인 경찰보다 흑인들의 분노를 잠재우는데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하니에 대한 애도 기간 중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호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흑인들에 의한 약탈·방화와 같은 치안 부재 상황은 백인들에게 흑인 정권 출현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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