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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3군 힘 모아 호국 통일 번영|삼정도에 담은 5공 통수 철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그러나 그 지휘도는 사베르 (Saber)란 서양식 칼로 삼정도와는 형태가 다르다.
83년6월 전용하씨는 30년에 걸쳐 공부하고 연마해온 장인의 솜씨를 정성 들여 칼에 담았다. 강철을 단조해 불에 구워 두들기기를 여덟번. 정제된 강철인 옥강으로 만드는 순간 그는 엄숙한 의식을 지냈다. 인시 (새벽 3시30분쯤)에 목욕 재계하고 성좌의 제왕인 북두칠성을 향해 제단을 만들어 「우주의 정기를 달라」며 빌었다. 인시를 택하는 것은 칼의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열처리 과정에서 붉은색의 정도를 판독하기 가장 좋은 시간으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임인년·임인월·임인일·임인시인 62년1월29일 새벽 이런 의식을 하며 사인검을 복원해본 적이 있었다.

<한 자루에 백만원>
드디어 어둠 속에서 서슬이 퍼렇도록 빛나는 칼, 쇠를 깎을 수 있는 칼이 완성됐다. 전장 1m (칼날 72㎝, 손잡이 폭 3.2㎝, 두께 0.7㎝)의 장검. 손잡이와 칼집에는 태극 (만물의 최고원리)·대나무 (충절)·용 (천하의 난리를 진압, 나라를 지키는 호국)·봉황 (대통령 휘장)·당초 (고유 전통 무늬)·무궁화를 장식했다.
손잡이와 칼집은 피나무 위에도 검장식에 옛날부터 쓰이는 상어 가죽을 입혔다. 칼날 한쪽에는 「대통령 전두환」이라는 금자 상감을 새겼다.
다른 쪽에는 받는 장성의 보직 계급을 은색 글씨로 집어넣었다.
경호실은 시제품으로 만든 이 칼을 문화재 관리국에 보내 품평을 받았다. 『전형적인 한국 칼의 모습이고 예술적 가치도 훌륭하다』는 찬사를 들었다. 전 대통령도 만족했다. 시제품이 만들어질 무렵까지 윤성민 장관의 국방부는 몰랐다.
국방부는 「충성심·사명감을 고양하고 개인의 명예와 영광을 대대로 전승하여 한국 고유의 전통성을 상징하는 지휘도를 하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공문을 올렸는데 이는 칼 한자루에 1백만원씩 드는 예산을 전용하기 위한 절차를 밟은 것이었다.
지휘도의 이름은 삼정도로 정해졌다. 당시 박중응 청와대 국방 담당 비서관은 여러개의 명칭 중에서 전대통령이 직접 고른 것으로 알고 있다』고 기억했다. 「육·해·공 3군이 일치하여 호국·통일·번영 세가지 정신을 달성한다」는 뜻이 삼정이다. 칼을 받는 대상은 군인사법에 따라 육군의 경우 사단장이상, 해군은 함대 사령관 (해병대는 사단장 이상), 공군은 전투 비행 단장 이상의 대통령이 임명하는 즉 중요 지휘관으로 한정했다. 보통 소장급 이상이 해당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지휘관을 뜻하는 「통수권자의 친보직」은 계급과 다른 측면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자리다. 한번 칼을 받은 사람이 새로운 보직 명령을 받을 때는 칼을 새로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방은 칼에 보직 내용이 적힌 수치만을 달아준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3월 군 지휘부를 개편하면서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의 신고를 받을 때 수치만을 매주었다. 그 수치에는 김 대통령의 이름과 보직 명칭이 적혀있지만 김 총장의 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 총장은 5공 시절 사단장으로 나가면서 삼정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편 후에는 날을 세워 만든 칼인 만큼 관할 경찰서에 도검류 신고를 하도록 했다. 출처증명은 대통령이 줬다는 하사증명으로 대체토록 했다. 가보로 남길 수 있도록 법적 조치를 해준 것이다. 주한미군 장성들에게도 처음엔 기념용으로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본국에 귀대할 때 개인 소유가 허용되지 않고 신고·기증하기 때문에 선물 주는 것을 중단했다.
삼정도가 공식 수여된 것은 83년8월. 1호는 통수권자인 국군 총사령관 전대통령이 받았다. 자기가 자신에게 줄 수 없으므로 윤성민 국방장관이 60만 국군 장병을 대신하여 칼을 드린다는 형식의 헌상식을 통해서였다. 1호에는 「대한민국 국군 장병이 삼가 드립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2호 (칼 번호 0002)는 윤 국방장관, 3호는 이기백 합참의장이 받았다. 4. 5, 6호는 황영시 육군, 오경환 해군, 김상태 공군 참모총장에게 주어졌다. 3군의 주요 지휘관 1백명에게 차례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수여 대상을 놓고 불만의 소리도 나왔다 소장급이라도 친보직이 아니면 칼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녹슨다" 항의 소동>
80년대초 신군부 권위의 상징으로 나온 삼정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희귀성과 가치가 떨어졌다. 86년부터는 장군진급만 되면 주었다. 「친보직 지휘도」에서 「장군도」로 격하된 것이다. 차츰 칼날에 녹이 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종종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 『모 소장이 녹이 난다고 내게 칼을 갖고 단단히 따지러 왔더군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칼을 준 것은 무신으로 수양을 하라고 준 것입니다. 구석에 팽개쳐버리니까 녹이 나는 것이지 자주 닦아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쏘아주니까 흥분하던 그 장군이 얼굴이 벌개져 돌아간 적도 있지요.』 (전용하씨 회고) 그렇지만 칼에 특별한 취미가 없는 한 바쁜 지휘관들에게 정성을 쏟으라고 하기는 곤란한 일이다. 계속 녹 문제로 말썽이 일자 6공들어 강철대신 녹 방지를 위해 스테인리스로 대체해 만들어갔다.
전용하씨도 그때쯤 해서 삼정도 제작에 손을 놓았다. 『날이 없는 칼을 만드는 것은 생명 없는 노리개를 만드는 것』이라는 장인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전대통령과 노 대통령의 무인으로서 철학이 다르다』고 말했다. 삼정도는 문민시대의 시각에선 희화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무」의 세계를 「문」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된다는 반론도 있다. 어쨌든 삼정도는 역사의 칼이 그렇듯이 한시대의 군사 문화와 병권 지휘자의 개성을 농축한 것임은 분명하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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