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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어린이책] 눈과 바람이 전해주는 슬라브의 옛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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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바다 속 왕국
조앤 에이킨 글, 얀 피엔코프스키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138쪽, 8500원, 초등 3학년 이상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동슬라브 지역(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이야기다. 책 제목은 평범하지만 이야기는 이채롭다. 11편의 신화와 민화 속에서 천둥과 번개, 새벽의 오로라, 따뜻한 태양은 인간의 운명을 손에 쥔 신(神)이 된다. 글자로 기록하기 이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에는 긴 겨울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살아온 동슬라브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들은 모진 자연 환경 뒤에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짧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선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단호한 기질, 삶에 대한 관조가 읽힌다.

 첫 작품 ‘바다 속 왕국’은 일상에 균열이 생긴 뒤에야 때늦은 후회를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바닷가에서 홀로 고기잡이를 하며 지내던 어부는 새벽의 여신 조리아의 은총으로 부지런하고 상냥한 아내를 얻는다. 그러나 그물을 짜고 저녁을 짓는 평범한 아내에게 이내 싫증을 내고, 금은보화가 가득한 바다 속 용궁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용궁은 낯설고 차갑다. 결국 어부는 아내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배나무’는 우리의 전래동화 ‘흥부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세상을 창조하고 얼마 뒤 하느님은 인간 세상을 돌아보라며 천사 가브리엘을 내려보낸다. 가브리엘은 가난하지만 착하고 어진 세 형제를 만나고, 이들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준다. 그러나 거대한 포도밭과 농장을 얻은 뒤 첫째와 둘째는 욕심쟁이가 되어 버린다. 결국 탐욕에 눈이 먼 두 형은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현명한 아내를 얻어 가난한 이들을 보살핀 막내만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마지막 이야기 ‘거위 치는 소녀’는 하느님이 된 사나이의 에피소드를 그린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동화 버전으로 이름 붙일 만하다. 어느 날 성 베드로는 하느님과 산책을 나가 “잠시라도 하느님이 되어볼 수 있다면 영원히 만족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하느님은 베드로의 소원을 들어주지만 ‘하느님 체험’은 하루 만에 끝나고 만다. 하느님이 된 베드로가 제일 처음 마주친 건 거위 치는 소녀. 아이는 축제에 간다며 거위떼를 내버려두고 사라져버린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돌봐주실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꼼짝없이 거위를 지키게 된 일일 하느님 베드로는 되뇐다. ‘다시는 하느님이 되고 싶지 않아.’ 동슬라브인들이 찾아낸 불만족스러운 일상에 대한 해답이다.

박연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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