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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주의에 흐려지는 여성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몇년전부터 여성학이란 새로운 인식법이 대중들 틈에 깊숙이 스며들어가고 있다. 대학마다 속속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고, 여성학적 시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각기 다양한 목소리로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여성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해 제대로 소화한 작품들은 흔치 않다. 박완서나 이남희 같은 소설가, 김승회나 김혜순·김정란 같은 시인들을 빼면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여성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은 형편이다. 최근『어쨌든 튀는 여자』같은 가벼운 신변잡기류의 수필들, 여성주의와는 거리가 먼 개성적 방종을 페미니즘이라고 착각했던 마광수의 소설들, 자의식이 강한 신여성을 그리는 척하다 결국엔 남자의 뒷바라지만이 이상이라는 결론을 유도한 영화『미스터 맘마』, 성공한 여자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는 도식을 벗어나지 못한 드라마『남편의 여자』, 남성과 여성의 왜곡된 관계를 단순히 성만 바꿨을 뿐 억압의 본질을 그대로 답습한 양귀자의 소설『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등은 상당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연극『자기만의 방』『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탑 걸즈』등과 영화『그대 안의 블루』등 최근의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는 페미니즘이란 겉옷을 걸쳤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답게, 억압당하지 않고 살자는 본래의 취지야 나쁠 게 없다. 그러나 여성학이 교묘한 상업주의와 맞물려 그 본질이 뒤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대중들의 고식적 정서에 영합해 여성은「피해자」, 남성은「가해자」라는 미숙한 2분법에 기대는 잘못을 들 수 있다. 이경자의 소설『절반의 실패』에서처럼 무위도식하는 유한부인조차 그녀가「단지 여자이기 때문에」미화되고 외도가 합리화된다면 곤란하다. 상업주의적 페미니즘이 빠질 수 있는 두번째 함정은 유능하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드라마나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을 통해 대중들이 일종의 허황된 꿈을 대리 만족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영화『물위를 걷는 여자』가 그 한 예인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성공해 호화롭게 사는 것이 마치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이상인 것처럼 호도했다는 비난이 있었다.
상업주의가 목표로 삼는 구매자들은 20대의 잠재적 실업여성들이다. 무조건 우아하고 세련된 직업만을 구하려는 고학력 여성들로부터 힘든 일은 싫고 쉽게 돈을 버는 서비스업이 낫다며 심하면 윤락행위까지 불사하는 젊은 여성들의 불만을 페미니즘이라는 그럴듯한 상품으로 무마하는 것이다. 즉『불평등한 사회가 여성을 이렇게 소외시켰고 타락시켰다. 그러니 지금의 내 불행은 전적으로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성중심주의 사회 탓』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순과 불합리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상업주의에 영합한 여성주의의 이론적 성찰없는 태도도 지적돼야 한다. 최근 페미니즘이 각광받는 것은 정신분석학과 실존주의에 반발하는 후기 구조주의와 그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즘 덕분이라는 점을 특히 여성 지식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고찰과 철학적 깊이가 없는 성급한 이론은 과격하고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여성해방이란 남성해방인 동시에 인간해방이란 점을 어떤 식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배타적 지식인들이 대중 속에서 어떻게 성공해 살아남을 것인가.
또 순진한 여성주의자들이 교묘하고 끈질긴 상업주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심을 갖고 더욱 지켜볼 일이다.【이나미<신경정신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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