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주먹 왜 맥못추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투지의 한국복싱이 세계무대에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작은 키, 짧은 팔 등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으로 강국의 면모를 유지했던 한국복싱이 이제 한계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세계선수권 첫날 두 체급의 패배를 놓고 비관론에 빠지기엔 아직 이르지만 분명한 것은 투지만을 앞세운 예전 같은 저돌적인 인파이팅이 냉정한 컴퓨터채점하에선 득보다 실만을 가져오는 「백해무익」이란 점이다.
지난 66년 방콕아시안게임부터 근 30년간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해온 한국복싱의 기본 전술은 기술→체력→정신력 싸움으로 이어지는 3단계 작전. 즉1회에 기술로 맞불어 역부족이라 생각되면 2회엔 힘으로 밀어붙여 보고 그도 안되면 3회엔 고추장보다 더 매운 투혼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3단계작전은 나름대로 효과를 봐 84년 LA올림픽과 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1, 2개씩을 따내는 개가를 올렸었다. 하지만 컴퓨터채점이 도입된 89년 모스크바세계선수권부터 불기 시작한 찬바람은 이젠 대수술을 요구하고 있다.
투혼을 발휘해 우세한 공세를 펼치더라도 깨끗하고 강도 높은 스트레이트가 터지지 않으면 결코 득점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량급의 간판 박덕규는 이날 쉴새없이 주먹을 뻗으며 선전했으나 펀치의 대부분이 거친 양훅으로 보는 사람들이 무안할 정도로 점수를 얻지 못했다. 결국 우세한 것처럼 보이기만 했지 심판들이 공감하는 득점펀치를 날리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결국 기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투지는 만용에 불과했을 뿐이다. 【탐페레=유상철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