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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파워게임에 무산된 외교개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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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3년째인 82년 두 가지 메가톤급 국정개혁을 시도한바 있다.
하나는 이·장 어음사기사건의 마무리와 지하경제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내놓은 금융실명제며 다른 하나는 외교현대화란 이름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정부 각 부처의 대외창구 통폐합계획이었다.
그중 실명제는 누차 언급한대로 김재익 경제수석·강경식 재무장관의 공세를 허화평 정무1수석과 권익현 민정당총장·노태우 내무장관 등이 꺾어 무산됐고, 반대로 대외창구 통폐합 계획은 허화평 수석의 세력이 쇠잔해져 빛을 보지 못한다.
허 수석과 이장춘 외교담당비서관이 추진한 대외창구 일원화계획은 외무부를 뺀 모든 부처가 달라붙어 눌러버렸는데 실명제때 허 수석에게 당했던 강경식 장관이나 김재익 수석도 개입했다.
그런 점에서 정권교체기의 개혁은 내용의 본질보다 이따금 권력투쟁의 도구로 이용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외교현대화계획은 그런 흔적이 농후하다.
또한 사람을 치고 자르는 인적개혁은 쉽지만 제도개혁은 역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역사적 경험이기도하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현대화계획의 전말은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
82년11월17일 오전 청와대.

<실명제무산 앙갚음>
허화평 정무1수석은 30분 후에 전대통령에게 올릴 외교현대화계획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훑어봤다.
7개월이란 오랜 기간과 정력을 쏟아 만든 최종 보고서를 전대통령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는 불안한 상념에 잠겼다.
전 대통령의 보안사령관시절 비서실장으로, 대권을 잡은 뒤 청와대비서실 보좌관으로 15개월, 그리고 82년부터 정무1수석으로 지근거리에 있었던 그만이 갖는 특유의 예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5월의 이·장사기사건과 실명제파동을 거치면서 그는 전 대통령으로부터 자신이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고 그런 여건에서 문제의 건의서가 채택되기 힘들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10월21일 차관회의에서 각부처가 극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그 같은 의견은 다른 채널을 통해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장춘 비서관이 왔다. 『브리핑준비가 다 됐느냐』고 물었지만 이 비서관도 종전과 같은 투지가 없어 보였다.
허 수석은 이 비서관, 그리고 이 보고서와 관계된 대통령위원회의 위원들과 함께 본관으로 올라갔다.
허 수석의 간략한 보고가 끝난 뒤 이 비서관이 연구과정 및 작업내용·향후조치 등 구체적인 브리핑을 했다.
허 수석이 예상한대로 전 대통령은 『수고했다. 그렇지만 검토할 부분이 있다. 추가보완해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작업을 시작할 무렵 보여주었던 따뜻한 격려는 찾아볼 수 없고 표현이 극치 상투적이었다.
본관을 나선 허 수석과 이 비서관은 전 대통령의 냉담한 태도에 허탈한 기분이었다.
「검토하라」는 전 대통령의 말뜻은 분명했다. 두 사람은 「실패한 개혁실험」앞에 씁쓸했다.
더욱이 허 수석은 이날의 보고가 전대통령과의 마지막 면담일줄 몰랐다.
한달여쯤 후 12월20일 경질될 때까지 그는 전 대통령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허 수석과 이장춘 비서관이 이 계획에 기울인 열정은 너무나 크고 개혁적이었다.
그해 3월 두 사람이 착수한 외교현대화계획은 정부 각부처가 나누어 갖고 있는 모든 대외업무의 창구를 외무부로 단일화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허 수석은 81년12월말 비서실보좌관에서 정무l수석으로 내려오면서 국정개혁 시나리오의 2단계로 제도개혁 구상에 착수했다.
그는 5공 정권의 캐치프레이즈인 개혁과 정화를 착근하기 위해선 제도혁신이 필요한데 어디부터 손을 댈 것인지 골몰하고 있었다.
그때 불을 지핀 것이 이 비서관의 외교현대화계획 아이디어였다.

<전 대통령 자세 변화>
이 비서관은 70년대 후반 런던에서 근무할 때 대외관계기관의 통합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한 영국총리직속위원회의 활동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영국과 비교하면 구멍가게 규모지만 한국외교가 나아갈 모델로 영국의 외교개혁을 염두에 두어왔다.
그가 청와대비서관으로 온 것은 제네바대표부 참사관시절인 80년10월 우병규 정무1수석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우 수석은 국회외무전문위원시절 외무부조약과장으로 국회에 나온 동향(마산)후배인 이 비서관을 유심히 관찰해왔다.
그의 정리된 식견과 소신이 마음에 들어 정무1수석에 앉으면서 그를 데려온 것이다.
우수석이 국회사무총장으로 나가고 허수석이 자신의 팀장으로 내려오자 이 비서관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오던 외교현대화라는 구상을 꺼내 허 수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허 수석도 숙정이란 인적개혁에 이어 제도개혁으로 눈을 돌리려던 시점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배짱이 맞아떨어진 두 사람은 여러 가지 토론을 하고 개혁플랜을 짰다.
당시 허 수석과 이 비서관이 개진했던 논리-.
『국제화·개방화시대에 있어 외교의 질적 향상이 시급하다.
한국외교는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미국의 국무부나 국방부관리·백악관참모들이 워싱턴의 우리공관장을 만나면 문제만 복잡해지고 더뎌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파견 나온 정보책임자를 만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다 보면 외무관료는 허깨비가 되기 쉽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국가체통을 갖추는 일이다.』
『통상업무를 지금처럼 기획원·상공부·재무부·농수산부 등이 중구난방 식으로 맡다보면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유신홍보를 위해 만든 해외공보관제도도 재검토해야 한다.
정부구조를 정예화하고 낭비적 요소를 없애야한다.
부처별로 분산 가동하고 있는 대외업무를 외무부로 종합·조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허 수석은 대외창구 통폐합에 착수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직접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개혁의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극비리에 초안을 만들어 3월11일 전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비서관은 한국외교 30년의 시대별 실태와 특징에 대해 소상히 브리핑한 뒤 국민외교시대의 과제와 전개방향을 설명했다. 이중에는 북방외교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경제공부에 한창이었던 전 대통령으로선 외교공부도 관심이 많았다,.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이래 이만큼 유익한 보고도 드물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젊은 외교관 신바람>
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허 수석은 「외교현대화에 관한 대통령직속위원회」라는 대외비 기구를 출범시켰다. 위원장은 이원경 올림픽조직위사무총장이 맡고 위원에 이상옥 싱가포르대사를 불러오고, 김달중 연세대교수·문희갑 기획원예산실장·정문화 총무처행정관리국장·심기철 외무부기획관리실장 등을 합류시켰다.
출발은 산뜻했다. 외무부의 김세택 법무담당관이 지휘하던 10여명의 젊은 실무빈원들은 신바람이 났다.
정부의 대외교섭창구를 외무부로 단일화하는 핵심시나리오를 짜는 젊은 외교관들이야 절로 신명이 날수밖에 없었다.
당시 외무부는 5공신군부의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군 출신 외인부대의 기세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허 수석은 『각 부처의 관료적 이해관계를 배제하라』고 독려했다. 실무진의 손에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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