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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자이 대통령, 아프간의 '케말 파샤' 꿈꿨지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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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04면

서방은 하미드 카르자이(49)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의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가 되길 바랐다.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와 같은 역할을 아프가니스탄에서 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카르자이는 그런 기대를 품게 할 만했다. 그는 인도ㆍ프랑스에서 유학했으며 영어ㆍ프랑스어 등 6개 언어를 구사한다.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는 카르자이가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남성’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부족 기반도 튼튼했다. 아프간 최대 종족인 파슈툰족의 포팔자이 씨족(50만 명)의 일원으로 태어난 카르자이는 99년 부친이 암살당한 뒤 씨족 지도자로 선출됐던 것이다.
반외세 전통이 강한 아프가니스탄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80년대 초반부터 반소 항쟁에 참여해 파키스탄을 근거지로 활동했으며 소련 철군 후 외교부 차관(1992~94)을 지냈다.

반탈레반 경력도 서방의 구미에 맞았다. 90대 초반 탈레반이 부상하자 카르자이는 탈레반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폭력을 종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94년 말부터 탈레반에 외세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보고 반대로 돌아선다. 95년에는 유엔 대사직을 거절하고 96년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자 파키스탄으로 넘어간다. 2001년 말부터는 미국의 반탈레반 전선에 가세, 미국의 지원으로 과도정부 수반이 됐다.

2004년 10월 카르자이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55.4%를 득표해 나머지 14명의 후보를 압도했다. 아프간 34개 지방 중 21개에서 승리했다. 취임 후 카르자이는 무자히딘·탈레반·공산주의자 등 모든 정파에 과거를 묻지 않고 문호를 개방했다.

그는 80년대 초 “외세의 개입과 부족주의가 아프가니스탄의 양대 저주”라고 한탄한 바 있었다. 2001년에는 “외세의 개입이 멈추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 종식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친미 민족주의자’인 카르자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험난하다. 그의 성공은 서방의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지원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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