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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 도는 납량특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0호 15면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납량특집은 ‘반공괴기전’이라 이름 붙여진 전시회였다. 지방의 어린이회관에 조악하게 꾸민 ‘귀신의 집’에 ‘반공’의 이름을 붙인 건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만 가능했던 발상이었지만, 어쨌든 공산당 귀신이 언제 뒤에서 손 내밀지 모르는 좁은 전시장의 기억은 오싹했다. 여름이면 TV에 구미호나 천년호가 나와 내 눈을 제대로 못 뜨게 했고, ‘수사반장’ 같은 데서도 “당신이 좋아하는 카레라이스 해놨어요” 같은 대사를 읊는 귀신 범인이 나와 잠을 못 이루게 했다. 일요일 아침에 하던 ‘명랑 운동회’의 납량특집도 생각난다. 한여름에 갑자기 스키장에 있는 출연자들을 보여주면서 “여러분의 시원한 여름을 위해 저희가 6개월 전 겨울에 촬영하고 있는 겁니다”라는 거였다. 열 명이 넘는 출연자를 데리고 해외촬영을 가기가 부담스러웠던 그 시절, 시원한 화면을 보여주기 위한 그 깜찍한 성의에 살짝 감동을 받았더랬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세월은 흘러 구미호나 천년호로는 콧방귀를 뀔 세련된 귀신들이 등장하고, 시원한 화면 하나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해외로 날아갈 수 있는 호시절이 됐다. 그런데도 요즘의 납량특집을 보면 어린 시절 느꼈던 무서운 재미나 감동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니, 이건 노후한 나의 감수성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재미가 없어서인지 헛갈리는 중이다.

‘상상플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폐교 특집을 했다. 이 ‘폐교’ 특집은 몇 년 전부터 등장해서 작년에는 ‘무한도전’도 했고 ‘해피선데이 여걸식스’도 했다. 이제는 시청자들이 그 패턴을 뻔히 다 외울 정도다. 폐교에 가서 귀신의 지뢰밭이 된 운동장을 통과한다. 출연자 중 한 명이 두려움에 질려 운다. 게임에서 진 사람을 빨간 방에 집어넣고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그러고는 모두 모여 귀신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 번 서로를 놀라게 한다. 말하자면 ‘폐교 납량특집’이라는 장르의 법칙인 셈이다.

그런데 ‘장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것이 이 폐교 장르는 도무지 이야기의 변주도 없고 출연자(귀신)의 차이도 도통 없다. 너무나 모든 게 똑같다. 그래서 문제가 뭐냐고? 납량이라는 이름에 맞게 겁나지도 않고 시원한 웃음 한번 터뜨려지지 않는다는 거다. 보는 사람들이 패턴에 너무 익숙해져 도무지 어떤 자극에도 반응이 무덤덤해져 있는데 화면 안에서 공포에 떠는 사람만 열심히 비명을 질러대니 한편으론 안쓰럽고 한편으론 뜨악해진다. 난발하는 비명 소리에 짜증지수만 팍팍 올라간다.

기껏 해외 특집이라며 괌에 간 ‘놀러와’ 같은 데서는 거기가 서울인지 괌인지 모르게 한밤중에 모여 앉아 열심히 수다를 떤다. 복잡한 일상을 탈출해 탁 트인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주는 해외 특집의 컨셉트는 이미 촌스러워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해외 특집을 보는 사람들은 ‘왜 외국까지 나가서 수다를 떨어야 하는 걸까’ 싶어 심드렁해질 뿐이다.

공포를 느끼고 휴양지의 풍경을 보면 더위가 가셔지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여름이면 그런 걸 즐기는 건 시즌 마케팅에 길들여진 조건반사일 게다. 그렇다고 만날 똑같은 자극에 똑같이 반응하라고 들이미는 건 좀 뻔뻔해 보인다. 납량특집, 제발 좀 달라질 수 없겠니? 간절하게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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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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