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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5. 서울사대부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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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필자가 입학했던 서울사대 부속중학교 용두동 교사 본관. 지금은 고려대 옆으로 이전했다.[서울사대부중 제공]

“조장희 학생 등 세 명은 우리 남산초등학교의 자랑입니다.”

 1950년 초 봄 남산초등학교 6학년 졸업반 때였다.교장 선생님이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합격한 나를 포함한 세 명을 전교생 조회 시간에 단상에 불러 올려 칭찬을 했다. 그 당시의 기분과 우쭐함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때 서울사대 부속 중학교는 6년제로 서울에서 가장 좋은 중학교로 꼽혔고, 입학시험도 특차로 치러졌다. 일류 중학교로 통하던 경기·서울·경복중학교는 이 학교 입시가 끝난 다음 시험을 치렀다. 당시 입학시험은 봄에 치렀다. 남산초등학교는 그 학교에 응시할 사람으로 6학년 8개 반에서 50명을 선발했다. 그 중에서 3명만 합격한 것이다. 시험을 준비했던 50명 중에는 나보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들이 무척 많았는데 대대수가 떨어지고 내가 붙은 것이었다. 그해 서울사대부속중 응시학생은 남학생 2400명, 여학생 1700명으로 경쟁률은 남학생 24대 1,여학생 17대 1이었다. 선발 인원은 남녀 각각 100명씩이었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당시의 입학 시험 경쟁률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 때 공부보다 엉뚱한 취미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서울사대부속중에 합격한 것이 너무 뜻하지 않던 행운처럼 생각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 ‘쾌거’는 평생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UCLA에서 CT의 비밀을 풀겠다고 선뜻 나선 배경에는 ‘서울사대부속중도 합격했는데 이걸 못하겠어’라는 자신감도 작용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인생은 운에 좌우된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무 것도 안하고 운 만으로 무엇이 되리라 보지는 않는다. 나름의 노력에 운이 보태져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당초 나는 서울사대부속중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취미 수준을 넘어섰던 광석 라디오 조립을 맘껏 할 수 있는 조선무선중학교(현 광운대 공대 전신)에 진학하려 했었다. 무시험 입학이 가능했던 것도 내 마음을 끌었다. 그 당시에도 과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집안 형편이 넉넉치 않았고, 공부에 대한 열의도 대단치 않아 과외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서울사대부속중은 용두동에 있었다. 지금은 고려대 옆 홍릉 쪽으로 옮겨져 옛 자취는 사라졌다. 내가 살던 정릉에서 용두동까지 버스와 전차를 바꿔타며 시험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함께 시험을 봤던 ‘동무’들 생각도 많이 난다. 서남표 KAIST 총장, 김종화(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변호사, 이인호 전 주 러시아 대사 등이 동기들이다.

김 변호사는 동기 중에서 가까운 편이었는데 머리가 명석한데다 성적도 아주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 당시 군 고위 장교로서 한국군의 중추 역할을 했던 기억도 난다. 각자 사는 방향이 틀려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10대 초반 함께 공부했던 동창들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흐르고 기분이 좋아진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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