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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표의 힘」못믿는 러 국민/김석환모스크바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25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러시아 연방 전역과 발트3국의 러시아인 집단 거주지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러시아인들에게 상당한 고민을 안겨줬다.
투표 전날까지 계속된 찬반양론과 시위캠페인의 열기도 그러했지만,시민들은 86년 페레스트로이카 실시후 너무도 자주 닥쳐오는 선택의 요구에 무척 곤혹스러운 모습들이다. 보통때 같으면 모처럼 일광욕을 하거나 휴일의 한가로움을 즐겼을 시민들은 지난주 내내 계속된 캠페인 효과 때문인지 당초 예상을 깨고 상당수가 투표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여줬다.
그러나 투표에 참가한 시민들이나 정치인들은 모두 이번 국민투표가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면서 사실상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동감을 표시,러시아 국민들과 정치인들의 냉소주의와 허무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수파의 우두머리인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의 이날 『러시아의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라는 선언,즉 국민투표가 정치투쟁을 종결시키지 못할 것이며 의회와 행정부는 권력투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말에 러시아인들은 전적으로 공감하는듯 했다.
모스크바 크라스노프 레스넨스카야 구역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보리스 칸다로프(40·엔지니어) 가족의 반응은 이런 점에서 무척 시사적이다.
아내,두 딸과 함께 투표장에 나온 그는 옐친대통령이 추구하는 경제정책은 싫지만 옐친대통령 이외의 인물도 없고 그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기 위해 찬성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이리나는 아보슈카(러시아 여인들의 시장바구니)에 담을 물건값이 매일같이 뛰는 마당에 도저히 옐친대통령을 지지할 수 없어 1번(옐친에 대한 신임)엔 찬성,2번(겅제정책)엔 반대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 부부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 시절에도 연방조약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으나 그후 몇개월 안돼 연방이 조각났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투표는 우리가 하지만 결과는 정치인이 만든다』고 말하고 『이번에는 나라가 깨지지말고 정치투쟁도 종식됐으면 좋겠다』고 한숨지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러시아 TV의 아나운서는 이번 국민투표가 국정의 중요이슈에 러시아 국민들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성공했으나 국민투표후 의회와 행정부가 더욱 격렬한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전망하는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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