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 파리를 디자인하다

중앙일보

입력


홈쇼핑 매니어라면 론(Lone)이라는 이름을 맨먼저 떠올리고, 패션 매니어라면 론 커스텀(Lone Custome)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디자이너 정욱준. 국내에서 '잘 나가던' 그가 서울을 벗어나 파리로 날아갔다. 박수갈채를 뒤로 한 채 준지(Juun J.)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2008년 봄·여름 파리 남성복 컬렉션에 신인 준지로 이름을 올린 정욱준의 한 달을 스케치했다.

#정욱준, 파리를 향하다
“정욱준이 파리에 간대”. 지난 봄 패션가에서는 그의 파리 진출 소식이 떠돌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컬렉션에 놓치지 말아야 할 쇼로 자리매김한 그가 컬렉션을 책으로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파리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소위 패션을 하는 사람들에게 파리는 꿈의 도시이자 '먼 그대' 다. 수 년간 그 곳에서 쇼를 하고 매장을 낸 선배들도 바람과 달리 현지에서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패션 경기가 좋지 않은 건 본고장 파리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탄만 하기엔 하고 싶은 것도 해 봐야 할 것도 너무 많은 그였다. 파리 출국을 앞둔 그를 만나러 작업실로 찾아 갔다.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그곳에 방금 이발한 머리를 가리고자 야구모자를 꾹 눌러쓴 그가 있었다.
“뭔가 아쉽지 않나요? 한 달이 더 주어지면 뭘 하겠어요?” 파리 데뷔쇼에 울려 퍼질 음악을 체크하던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옷걸이에 걸린 옷 몇벌을 가리키며 “저거 다 끝난 거 아니에요. 파리에서 현지 모델들에 맞춰 다시 수정해야 해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모든 것이 낯선 파리에 가겠다고 했을 때 어려운 일, 섭섭한 일이 어디 한둘이었겠냐마는 그는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직접 해야 해요. 적당히 타협하는 법이 없죠.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일이 고통스러웠어요.”
옷은 트렌치 코트의 모티브를 곳곳에 활용해 완성됐다. “리포지셔닝(repositioning)이 주제에요. 상의에 사용되는 디자인이 하의에 적용되고, 하의가 다시 상의로 옮겨지고, 옷을 해체해 다시 조립하는 일을 반복했죠.”
 
#파리의 새 얼굴, 준지
기자를 만난지 이틀후 그는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선 신인임에도 준지라는 이름의 컬렉션 라인은 이미 유수의 패션 잡지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홍보대행사로부터 준지에 대한 현지 패션관계자들의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의 쇼는 파리 남성복 컬렉션의 첫 날 세 번째로 스케줄 상 한참은 불리하다. 바로 전날까지 밀라노에서 패션쇼가 이어져 밀라노 쇼에 섰던 톱 모델들이 피팅시간에 맞춰 오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컬렉션 첫 날의 쇼는 유명 디자이너가 아니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기자들의 습성이다. 그래도 불평만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하는 쇼이지만 파리에선 그저 한국에서 온 신인 디자이너의 데뷔전일뿐이니까. 쇼 당일까지 거의 잠을 못자는 강행군을 한 덕분일까. 행운의 여신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밀라노에서 건너온 모델들을 쇼 전날 저녁에 만나는 바람에 옷 수정에 필요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하나도 수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안 그랬으면 쇼 당일 아수라장이 될 뻔했죠.”
쇼장은 당초 우려와 달리 기자와 바이어들로 꽉 찼다. 그 중엔 파리패션협회장도 있었다. “패션쇼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직감이란게 생겨요. ‘아! 이번엔 되겠구나’하는. 음악이 쇼장에 울리고, 내 옷을 입은 모델들이 워킹을 하고 돌아오는데 뭔가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의 직감은 적중했다. 파리패션협회장 디디에르 그럼바로부터 다음 시즌 스케줄 우선권을 주겠다는 답을 받았다.
그리고 이틀 뒤 실시간으로 컬렉션을 보도하던 <르 휘가로>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목요일에 펼쳐진 컬렉션 중에는 아주 특별한 흡인력과 영향을 준 한국인 준지가 있었다. 그의 옷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고, 디자이너의 독창성이 돋보였다.”
 
#준지와 론 커스텀 그리고 정욱준
기자는 막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다시 마주했다. 파리 현지의 호들갑스럽던 반응에 비하면 서울은 너무 조용했지만 그의 얼굴엔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 시작이죠. 연말까지 주문된 수량을 착실히 만들어 보내야 하고, 8월엔 원단을 구입하러 출장을 가요. 내년 초에 있을 가을·겨울 컬렉션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둬서인지 많은 부담감을 느낀다며 당분간 서울컬렉션에 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파리의 준지와는 별도로 그의 브랜드 론 커스텀은 이어간다.
패션계는 샴페인 버블같아서 이렇게 화려한 수식어로 찬사를 날리다가도 금방 돌아서 버린다는 걸 잘 아는 그는 지금의 명성이 버블이 아님을 꼭 보여주고 싶다며 기자와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프리미엄 조세경 기자 sage38@joongang.co.kr
사진=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