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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대형’ 수입차가 달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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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인기를 끌던 차종이 있었다. 2L 중형차 크기의 차체에 1.5L 엔진을 얹은 준중형차였다. 2L 중형차가 부와 성공을 상징하던 시절, 준중형차는 상대적으로 값싼 유지비로 넓은 실내와 적당한 품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은 소형차와 중형차 사이를 메우며 당시 단출했던 국산차 라인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반면 무거운 차체에 비해 엔진이 작아 힘이 부족했다. 배기량 1cc당 세금을 부과하던 자동차 세제가 만들어낸 시대 산물이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차 크기가 줄어들고, 엔진기술이 발달해 준중형차는 적당한 크기에 성능 좋은 엔진을 쓰며 ‘힘 부족’의 오명을 벗기 시작했다.

올 들어 이와 비슷한 복제판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차체는 크고, 배기량은 줄인 차들이 쏟아지고 있다. 과거 소형차와 중형차 사이였다면, 이젠 중형차와 대형차 사이의 시장이 생겨나고 있다. 올해 초 현대 그랜저가 2.4L 모델을 추가하면서 가격을 낮췄다. 비슷한 성격의 2.3L급 르노삼성 SM7과 경쟁한다는 복안이다. 그랜저는 3.3L, SM7은 3.5L가 대표 모델인 것을 감안하면 가격을 낮추고 유지비 부담을 덜어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다.

 이런 상황은 수입차라고 예외가 아니다. 중형차 이상의 크기에 2L 안팎의, 또는 그 이하의 엔진을 얹은 엔트리급이 늘고 있다. 아우디의 대표적인 중형차 A6는 올해 초부터 배기량 2L 모델을 팔고 있다. 현대 그랜저보다 차 길이가 길고 폭이 넓지만 배기량은 2L가 안 된다. 터보를 달아 힘 부족은 어느 정도 만회했으나 분기별 세금은 현대 쏘나타 2.0L와 똑같다. 값은 5990만원. 가장 비싼 A6 4.2L보다 5000만원 싸다.
 벤츠 역시 지난해 단종시킨 E200K를 지난달 부활시켰다. 강화된 배기가스 규제를 만족시키지 못해 지난해 단종했으나 국내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효자 모델인 만큼 엔진을 손봐 다시 들여왔다. 아우디 A6나 현대 그랜저에 맞먹는 크기지만 배기량은 고작 1800cc다. 값은 아우디 A6 2.0과 똑같은 5990만원.
 현대 에쿠스에 맞먹는 큰 덩치와 중후한 디자인이 특징인 크라이슬러 300C는 가장 아랫급에 2.7L 모델을 달고 있다. 가격은 4480만원. 300C 2.7은 큰 덩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엔진이 작고 출력도 부족하다. 계약 단계에서 가격을 부담스러워하는 고객에게 적절한 대안으로 소개되고 있다. 300C의 간판급 모델은 V8 5.7L 엔진을 얹고 7000만원에 팔린다.

 이 밖에 후속모델로 교체된 BMW 520i와 푸조 607 역시 덩치에 맞지 않게 한때 2.0L와 2.2L 엔진을 얹었다. 이런 수입차의 저배기량 추세는 세금과 유지비 절약은 물론 차 가격을 낮춰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수입차의 성장은 국산차의 성능과 배기량 상승을 이끌었다. 자연스레 자동차 문화가 한 단계 발전하는 초석도 되었다. 하지만 이제 수입차가 거꾸로 저배기량 모델을 속속 들여오고 있다. 배기량에 따른 세금제도와 고유가 시대가 지속되는 한 이런 저배기량의 덩치 큰 차는 계속 세력을 넓힐 예정이다. 일부에선 “수입차가 자동차 문화의 퇴보를 이끌고 있다”는 의견도 팽배하다. 이런 폄하 속에서도 저배기량 중대형차는 뚜렷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월간 스트라다=김준형 기자 junior@istrad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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