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본사 안성규기자가 본 「오늘의 러시아」|「살인물가」먹고 살기도 "빠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러시아에는 지금 사회주의의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실험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같은 체제전환에는 신구질서의 틈바구니에 끼여 신음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이 있게 마련이다. 다음은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어학연수를 위해 최근 1백일간 러시아에 체류했던 중앙일보 안성규기자가 본 「러시아의 오늘」이다.
모스크바는 바람막이도 없이 자본주의의 폭풍에 내던져져있다.
폭풍은 구질서와 구질서에 매달린 사람들을 날려버리면서 새로운 질서를 위한 빈터를 만들어가고 있다.
빈터에는 「죽어가는 자」와 「살려고 하는 자」의 명암이 교차하고 있다.
허물어지는 구질서에 매달린 사람이 전자라면 개혁바람에 올라타 한밑천 잡으려는 사람이 후자다.
구질서에 매달려 도태되는 군상의 측은함과 이들을 딛고 서는 경쟁의 냉혹함이 모스크바의 거리에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명암 엇갈린 개혁>
「인민을 위한 개혁」이 과연 인민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것인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사슈아(29·모스크바거주)는 요즘 개혁을 어떻게 생각해야될지 자신이 없어졌다. 개혁이후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구식 장농이 딸린 방 2개, 가스레인지가 있는 부엌, 냉·온수가 펑펑 나오는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13평 아파트가 자신의 재산이 됐던 2년전만해도 개혁은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와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살기가 너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그의 월급은 현재 8천루블(3월말 현재한화 8천원정도). 중학교 영어교사인 부인소득과 합해 한가족의 한달수입이 1만5천루블정도 된다. 그 정도로는 빵과 소시지만 먹고 국민학교 1학년생인 아들 니키타(7)를 학교에 보내기에도 빠듯한 돈이다.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먹으려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다.
마가진(상점)에는 싱싱한 채소가 없으므로 르녹(자유시장)으로 가야 한다. 르녹에서 오이 두개에 1천루블이다. 그것도 쌀 때가 그렇다.

<지하철요 40배껑충>
쇠고기 1kg에 1천루블에서 2천루블사이며, 포도는 1kg에 1천루블. 그러니까 한끼에 고기 1kg과 오이 두개를 먹고 디저트로 포도를 먹으면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진다.
새옷을 산다든가, 가족나들이·문화생활은 꿈조차 꾸지 못한다.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개혁이 시작되면서 발생한 초인플레이tus이 러시아 서민들을 거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1루블이었던 모스크바 지하철값이 12월에는 3루블로 오르더니 올해 2월중순에는 6루블로 껑충 뛰었다. 지난해 11월기준 6백%오른 것이다.
가격자유화가 시작된 91년중반 지하철요금이 15코페이카(1루블은 1백코페이카)였던데 비하면 무려 40배 오른셈이다.
러시아인이 즐겨먹는 양꼬치구이 샤스리크는 지난해 11월 80루블이던 것이 올해 2월 8백루블로 올랐다. 손가락 두마디정도 크기 양고기 5∼6개구이의 가격이 그렇다.
러시아 정부 공식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생산자 물가는 3천2백80%, 소비자 물가는 2천5백10% 상승했다.
그동안 월급은 평균 3천루블에서 8천루블로 2백60%정도 올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초인플레속에서 더 잘 살아가는 부류가 있다.
모스크바대 물리학부 4학년생 세르게이 바르코프는 지난해 7월 10만루블을 벌었다. 보통시민의 30배이상 소득이다.
그의 직업은 「비즈니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달러를 루블로 바꿔주거나 외제물건을 이리저리 유통시켜 수수료를 챙기는 일이다.
비즈니스맨의 생활은 환상적이다.

<임대로 졸부 속출>
그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국레스토랑 상해에서, 모스크바 코스모스호텔에서 보트카를 곁들여 한끼에 1만루블이 넘는 식사를 하고, 한갑에 3백루블이 넘는 말보로를 쌓아두고 피운다.
모스크바의 호텔 카지노에는 출입금지를 뚫고 들어온 러시아인들이 개당 5천루블이나되는 칩을 30∼40개씩 들고 노름판을 벌인다. 주머니에서 몇백달러씩 갖고 있기는 예사다.
붉은광장옆 국영백화점 굼에서 대당 5백∼6백달러씩하는 외제 TV를 사가는 사람이나 벤츠와 사브스카니아등 고급외제차 주인은 거의 다 러시아인이다.
1백만루블이 넘는 아파트를 몇채씩 가지고 임대수입으로 사는 졸부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비즈니스의 열기는 러시아 어디에서든 확인할 수 있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하철역사 주변과 지하도에는 예외없이 좌판들이 늘어서 있다.
입에 빨간 루주를 칠한 금발의 예쁜 처녀, 젊은 청년, 샤프카(러시아 털모자)를 쓰고 그럴듯한 외투를 입은 점잖은 중년남녀, 검고 낡은 외투를 뒤집어 쓴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들이 옷가지나 절인 오이·책·외제물건등을 들고 하염없이 서서 손님을 기다린다.
개혁은 경쟁과 자본주의의 뿌리를 동토에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싹이 어떤 꽃을 피울 것인가를 예측하기에 아직도 모스크바의 가시거리는 너무 어둡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