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21)“충계심만 있으면 뭐든 학수 있다”|안기부장 고사한 노신영씨 질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허지평정무1수석은 자신과 허삼수사정수석의 퇴진을 5공출범「키 플레이어(Key Player)」들의 퇴장이라고 표현했다. 82년 5월 이·장사기사건은 청와대·안기부·내각·민정당에 약간씩의 시차를 두고 간판인물을 교체하는 회오리를 몰고 왔다.

<청와대주변 찬바람>
전두환대통령은 키 플레이어의 교체와 함께 보안사· 국세청· 경호실등 국가통치를 뒷방침하는 주요기관도 직할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전대통령은 그같은 작업을 단계적이고도 극비리에 진행했다. 때문에 권력주변에 찬바람이 돌았고 때로는 터질듯한 긴박감이 짓눌렀다. 전대통령은 두허수석을 자르기위한 예비단계로 안기부장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유학성·권정달에서 노신영·권익현으로 바꿨다. 토사구팽(토사구팽·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 은 김영삼대통령과 김재정의원 간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개국공신은 주장이 강하거나 쓸모없어지면 쫓겨나는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다. 권력의 속성은 대드는 부하를 좀처럼 용납하지않는다.
난세의 충신은 자칫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기 쉽기 때문이다.
전대통령은 두허수석을 청와대로부터 내보내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거북하고 껄끄러운 두허수석 대신 고분고분하고 충성심 강한 인물을 골랐다. 정무수석에 정순덕 민정당의원,사정수석에 정관용선관위사무처장을 내정해 놓고 두허수석이 스스로 물러나게끔 분위기를 몰아갔다.
전대통령이 노신영외무장관을 안기부장에 기용한 것은 쿠데타세력의 장형격인 유학성의원을통해 허씨들을 경고한 것인 동시에 테크너크랫에 대한 신임의 표시이기도 했다. 전대통령은 이미 김재전경제수석을 통해 관료의 우수성을 확신하고 있던 터였다. 더이상 「5공창업 주주」에 의존하지 않아도 할수 있다는 의지표시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도 전대통령은 유독 장세동경호실장에게는 두터운 신임을 주었다. 장실장은 소장진급과 함께 계속 자리를 지켜 경호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경질의 소용돌이는 전대통령의 주변인물에게 새로운「처신」의 기준을 제시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노태우 내무장관이었다. 그는 두허씨의 추락과 전대통령의 기세를 지켜보면서 철저히 몸을 낮추었다. 노장관은 이· 장사건이나 실명제파동때 두허수석 편에 섰었으나 전대통령을 자극할까봐 행동엔 소극적이었다, 내심 두허수석의 독주를 전대통령이 견제하는데에 동조하는 인상을 주었다.
민정당의 권익현총장체제는 두허수석과 권정달등 보안사 참모출신 중심의 정당운영을 뒤엎었다. 전대통령은 허화평수석이 사양한국세청장에 안무혁사회정화위원장을 임명했다. 두허수석은 뽑히고 그 자리에 새로운 권력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노태우·노신영·장세동 3인은 두허수석과 근본적으로 전대통령을 모시는 스타일이 달랐다.전대통령으로부터의 권한위임도 적은 편이었으며 진언의 강도나 독자적 영역확보 의지면에서 두허수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두 나름의 더 큰 야심을 품고있었다. 85년 2·12총선이후 민정당(노태우대표) 안기부(장세동부장) 내각(노신영종려)을 이끈 이들은「전두환 이후」의 경쟁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이·장사건이 가져온 상황변경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전대통령이 이항마의 대대적 개편을 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까블어봐야「차관급」>
82년11월말 전대통령은 민정당의 정순덕의윈을 급히 찾았다. 정의원으로서는 뜻밖의 청와대독대부름 이었다. 이는 국회재무위의 여당간사에 불과한 전국구의원으로서 그해 7월부터 권력핵심간에 뜨거운 논쟁과 갈등을 빚은 금융실명제 문제에서는 비켜서 있었다.
정의원의 회고.『나는 그때까지 실명제를 둘러싸고 그런게 심한 논란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대통령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단계적 시행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전대통령도「그게 맞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전면실시 입장에서 후퇴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뒤 열흘쯤 있다 대통령이 다시 불러 갔더니 느닷없이 정무수석을 맡으라고 하더군요. 「허화평수석도 있고, 정치도 잘 모른다」고 사양했지요. 그랬더니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면서 충성심만 있으면 할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1군단참모장으로 있던 그를 정치속에 스카우트한 사람이 바로 허화평수석이었다. 비록 육사는 1년 후배지만 허수석은 선후배간에 신망이 있었고 전대통령과의 현재 관계를 잘 모르던터라 정의원은 일단 전대통령의 후임을 맡아달라는 지시를 고사했던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 전대통령은 당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이 일을 무척 애용하는 편이었다.
전대통령은 정의원에게 후임을 맡으라고 함과 동시에 두허수석에게는 청와대밖의 직책을 맡으라고 말했다. 처음엔「허화평대구시장, 허삼수철도청장」을 제시했다. 『너희들이 까불어봐야 여타 차관급과 다를게 뭐 있느냐』는 메시지였다.

<박판제씨엔 괘씸죄>
당시의 상황에 대한 민자당의원 A씨의 회고.
『국가운영의 전반적인 체계를짠 허화평수석이나 사정의 서슬퍼런 칼날을 휘두른 허삼수수석에게 그런 직책이 어울리기 만무했지요. 전대통령은 현장에서부터 다시 밟아 올라오라는 뜻이었을지 모르지만 본인들에겐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지요. 전대통령은 허화평수석이 들은척도 하지않자 국세청장을 제의하기도 했지요. 두 허수석이 버티자 전대통령은 아예 외국에 나갔다오라고 쫓아버린 겁니다.』
두 허수석이 나가자 전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들의 업무관장을 새로이 조정했다. 허화평정무1수석이 맡았던 국방·법률비서관을 김태호정무2수석밑으로 돌렸다. 허수석은 섭외(최창윤) 체제홍보(이수정→김길홍) 외교·안보(이장춘) 국방(박중응·당시준장) 법률(박철언)업무를 관장했었는데 전대통령은 이를 권한의 집중과 비대화로 파악했던 것이다. 특히 국방비서관을 정무2수석실로 돌린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허화평수석은 국방비서관을 거느리면서 군부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비서관출신 Q씨의 증언.『국방담당비서관을 교체할때면 황영시참모총장이 허화평수석에게 결심을 물어온 경우도 있었지요. 허수석은 「총장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했지만 군을 상당부분 관리했습니다. 전대통렁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였겠지요. 후일 허수석은 내가 만일 후계에대한 야심이 있었다면 당시 군부에 얼마든지 힘을 심을수 있었고 이용도 할수 있었다. 나의 진의는 전대통령을 돕는 것이었는데 서로 발상의 출발이 달랐다고 회고한 적이 있지요.』

<26면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