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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그리운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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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하림(1939~)의 '그리운 날' 전문

포플러 나무들이 거꾸로 서 있는
강으로 가, 저문 햇빛 받으며
우리 강 볼까, 강 보며 웃을까
이렇게 연민들이 사무치게 번쩍이는 날은



은적암 노 공양주보살의 청국장 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창호지 문 밖에는 펑펑 동백꽃, 하늘 아래 땅 위의 모든 시간들 속으로 펑펑 동백꽃…. 문득 수저를 들어 한입 청국장에 혀를 적시면, 아득히 썩는 생의 길목에도 동백꽃은 피어 절정인데, 이마가 파란 새 한 마리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다. 봄에 새 잎이 돋을 때 포플러 나무 어린 순에서 나는 냄새가 있다. 새로운 생이 비롯되는 순간의 환희. 겨울을 온전히 견딘 강물 냄새와 그 냄새가 만나 강물 속에 거꾸로 서 있을 때가 있다. 은적암 노 공양주보살의 청국장 속에 거꾸로 서 있는 겨울 포플러 나무들이 보인다. 뿌리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얼음강 위를 묵묵히 걸어가는 이의 눈빛이여. 뼈와 속살을 다 썩힌 뒤에야 온전히 찾아오는 생의 그리움이 있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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