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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칼럼

푸틴이 서방과 맞서는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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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러시아와 미국·유럽연합(EU)의 관계가 왜 이렇게 급속히 나빠지는 것일까? 거기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EU 확장, 군비 통제, 발칸 지역 전쟁, 옛 소련권에서의 영향력 확장 경쟁을 비롯한 적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양 진영 간의 긴장을 가중하는 또 다른 요소는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크렘린의 불안이다. 러시아는 최근 강하고 독단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관철하려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크렘린은 러시아의 힘이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국내외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미국이 폴란드에 10기의 요격 미사일을 배치하고 체코에 레이더 시스템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미·러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은 동유럽 미사일방어(MD) 계획이 이란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크렘린은 러시아를 향한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를 속였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러시아 지도부는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 가입국들에 MD를 구축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토가 동유럽으로 확장하는 것을 묵인했는데 미국이 이 약속을 위반했다는 생각이다. 오일 달러는 러시아에 안정을 되찾아줬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보다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마련해 줬다.

그러나 크렘린이 서방에 공세적으로 나오는 데는 또 다른 긴박한 이유가 있다. 반(反)서방 정책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반미주의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고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러시아 민족주의는 옛 소련 지역으로 확장을 계속하고 있는 EU와 나토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의 힘이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크렘린의 반서방 정책을 부추기고 있다. 이 같은 우려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첫째, 러시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점증하는 결핵·에이즈 감염률, 과다한 술·담배 소비 등으로 남성의 평균 수명이 59세로 줄었다. 2000년 1억4600만 명이었던 러시아 인구는 현재 1억4200만 명으로 줄었다. 유엔의 최근 보고는 향후 40년 동안 러시아 인구가 4000만 명이나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국가 경제의 장기 전망 차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통계 수치다.

둘째, 푸틴 정부가 오일 수입을 에너지 인프라에 충분히 재투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러시아의 에너지 민족주의 경향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러시아가 자국 에너지 분야에 대한 외국의 투자를 억제함으로써 기존 에너지 생산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앞으론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다. 크렘린과 그에 충성하는 기업인들이 단기간의 정치적 인기를 노려 장기적 성장에 필요한 투자를 희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셋째, 러시아의 성공한 기업인들이 자기 나라를 여전히 단기 고수익 창출지로만 생각할 뿐 장기적 투자처로는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러시아 국내 정치가 약간만 불안해져도 이들이 곧바로 자금을 외국으로 빼돌릴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뒤를 봐주던 정치권의 후원 세력이 자칫 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투자자들이 올해 말 총선과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자금을 해외로 빼돌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크렘린은 자국 경제의 이런 취약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지배 엘리트들은 서방과의 대결로 국내 지지도를 높이는 것이 상대적으로 국력이 강해진 현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언 브레머 국제정치 컨설팅 회사 유라시아 그룹 대표

정리=유철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