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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쉼] 황금빛 액체 … ‘황제의 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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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얼음을 반씩 채워넣은 아이스 버킷(얼음을 담는 그릇)에 샴페인 한 병이 꽂혀 있다. ‘퐁~!’ 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를 제거한다. 길고 우아한 플루트(flute, 샴페인용 잔)로 쏟아져내리는 황금빛 액체. 비너스가 탄생했다는 그 바다 거품이 이럴까. 일제히 솟구친 수십만 개의 기포가 플루트 가득 우주의 황홀을 연출한다. 이것이 ‘크리스털(Crystal)’, 황제의 샴페인으로 불리는 세계 최고급 와인이다. 샴페인의 계절 여름, 프랑스 샹파뉴(Champagne)에 있는 크리스털의 제조사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를 찾았다.

 

<랭스>글·사진=이나리 기자

루이 로드래의 샴페인 저장고(左)와 양조탱크.

연간 300만 병 한정 생산 “품질 유지”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샹파뉴의 중심지인 랭스(Reims)는 ‘샴페인의 수도’로 통한다. 루이 로드레뿐 아니라 크룩, 뵈브 클리코 등 세계적 명성의 샴페인 하우스가 여기에 있다. 샴페인이라는 게 샹파뉴의 영어식 발음 아닌가. 같은 발포성 와인이라도 샹파뉴 이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은 샴페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탈리아 것은 스푸만테, 스페인은 카바, 독일은 젝트, 미국 것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루이 로드레는 1776년 뒤부아 가문이 설립했다. 홍보 이사인 마리 로슈 위팅턴의 안내로 양조장을 꼼꼼히 둘러봤다. 암흑 속 미로 같은 거대한 지하 저장고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위팅턴은 “샴페인 제조는 비발포성 와인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고 말했다. 와인 제조의 일반적 어려움과 더불어, 효모와 설탕의 황금비를 찾아내고 찌꺼기를 완벽하게 분리해내는 등 한층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구나 랭스는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 가혹한 환경에서 자란 포도로 더 ‘가혹한’ 양의 샴페인을 생산하고 있음이다.

 이 회사의 오너 겸 사장인 프레데릭 루조와 오찬을 함께했다. 루조는 “루이 로드레는 프랑스 와인업계에 몇 남지 않은 가족 경영 회사”라며 “소량 생산은 이런 루이 로드레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1850년 루이 로드레는 세계 샴페인 생산량의 10%(250만 병)를 감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1%(300만 병) 남짓. 시장은 날로 커지는데 장인 정신을 앞세워 규모 확장에 인색했던 탓이다. 크리스털의 경우 포도작황이 나쁜 해에는 아예 만들지 않는다. 크리스털이 우리나라에서 고급 와인의 대명사로 통하는 모엣 & 샹동의 ‘동 페리뇽’보다 훨씬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데에는 이런 품질 지상주의가 큰 몫을 했다.

 샹파뉴 샴페인은 보르도 5대 샤토 수준의 진지함을 갖추고 있다. 아이스 버킷에 30분 정도 담궜다가 섭씨 6~7도가 되면 조심스레 따르는 것이 정석. 상온에 노출되는 즉시 샴페인 온도가 올라가는데 8~10도가 가장 마시기 좋은 때라 한다. 샴페인은 흔히 축하주로 쓰인다. 위팅턴은 “맛이 화사하고 기포가 화려한 탓도 있겠지만 너무 비싸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샴페인 소비량은 날로 늘어, 대유와인의 김새길 팀장은 “올 상반기만 해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이상이 팔렸다”고 말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위해 맞춤 제작

 크리스털을 ‘황제의 샴페인’이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1876년 루이 로드레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위해 맞춤 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황실의 셀러 마스터(와인 저장고 책임자)가 랭스로 와, 1년 가까이 머물며 황제의 입맛에 맞는 샴페인을 함께 연구했다. 크리스털이란 이름은 황실 소믈리에가 이 샴페인을 투명한 수정(crystal)병에 담아 서빙한 데서 비롯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크리스털은 큰 위기를 맞았지만 신흥 부르주아 시장이 열리면서 새 전기를 맞았다.

 크리스털 2000년의 국내 소비자가는 무려 50만원. 더 싸게 파는 경우도 있다지만 어쨌거나 입 딱 벌어지는 액수다. 루이 로드레가 생산하는 또 다른 샴페인 ‘브륏 프르미에’ 도 12만원이다. 대안이라면 이탈리아나 스페인, 신대륙의 스파클링 와인들. 같은 샹파뉴산이라도 3만~4만원대의 제품 또한 없지 않다. 명품은 명품대로 두고, 스푸만테나 카바 한 병을 호기롭게 따 이 여름밤 한번 확 피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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